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7)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모든 2 2018. 8. 26. 14:28

 

● 누가 너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 수금은 바로 저 소녀의 마음일 겁니다. 기댈 것이라곤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금밖에 없네요, 저 소녀는! 슬픔과 고독을 수금에 실어보고 싶었으나 끊어진 수금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줄 모르니 또다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단장(斷腸)이라 해도 좋을 깊디깊은 절망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럴수록 소녀는 자기 자신 속으로 아득히 숨어들고 있습니다. 저 풍경이 도피일까요, 치유일까요?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녀의 눈을 보십시오.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보지 않는 거지요. 그거 아십니까?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만 보는 신전의 사제들은 대부분 장님이었다는 것을.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게 도와주는 타이리시아스가 장님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상처 받았다고 느낄 때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예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 때는 오히려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자기 숨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도피는 치유는 아니지만, 종종 도피가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소녀가 구(球)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저 원은 지구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부드러운 선이라 느껴집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지쳐버린 소녀를 무심하게 드러내는 저 구가 동굴 같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헛디디다 상처투성이가 된 내가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신을 숨기는 자신 속의 동굴 말입니다.

 

  동굴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그 시간은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접는 시간입니다. 행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는, 혹은 미친 듯 떠도는 시간이지요.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이고, 비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그 동굴의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동굴로 숨어들게 했던 두려움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비축케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심지가 굳은 내 친구가 겹쳐집니다. 끊어진 수금 대신 말 못하는 강아지를 안고 위로를 받았던 외유내강형의 친구가. 친구의 강아지 초롱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슬픔에 찬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아, 이 친구는 한 마리 개를 잃은 게 아니라 가족을 잃었구나, 초롱이와 함께 보낸 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나는 우리가 초롱이를 돌봐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초롱이가 우리를 지켜줬던 거야. 한참 어려울 때 집안에 들어온 강아지거든. 힘들어서 집에 들어가 그저 핸드백을 툭, 던져놓고 20분씩, 30분씩 초롱이를 안고 있었던 적이 참 많아. 그러면 초롱이는 내 아픔을 아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게 내겐 기도였던 거 같아. 초롱이는 울 수조차 없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서 편안히 나를 위로해준 사랑이었어!” 


  희망은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싹을 틔웁니다. 우리에게는 동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견디는 시간이. 제대로도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때까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