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갱은 이렇게 썼습니다. “태양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다워 자꾸만 쳐다봅니다. 여인의 맨발을 보고, 나도 맨발이 됩니다. 햇빛을 머금은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맨발로 온 들을 거닐었습니다. 여인이 그립습니다.”
저 여인 같지요?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아도 저 여인의 눈빛은 지나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심이 있는 자의 차분한 눈빛, 자신을 보는 이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눈빛!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눈빛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고갱의 다른 그림의 제목을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타이티에서 고갱의 그림은 그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고갱은 왜 훌훌 털고 타이티로 들어갔을까요? 분명 고갱이 그린 타이티는 ‘고갱’의 타이티이지 ‘타이티’ 자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티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사람은 자기만의 언어를 발견합니다. 거기서도 삶은 고달프고, 어설프게 흘러들어간 문명은 실망스럽고, 몸은 병들고, 가난은 계속되었다고 아는 척을 해도 분명히 거기선 어제와 같은 오늘, 파리의 일상과 같은 일상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폴 고갱,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1893년, 캔버스에 유채, 92.5×73.5㎝,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싫은 우리는 모험하지 못하는 핑계를 잘도 찾아내지만 그래서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흘러들어간 고갱은 보았습니다. 타이티의 태양과 바다, 그리고 태양빛에 그을린 건강한 여인들을. 그리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햇빛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건 열대과일만이 아니라는 걸.
사실 저 여인에게 압도되는 것은 슈퍼모델급 미모여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다져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있으나 자연에 속해 있습니다. 그녀가 사는 마을, 그녀의 친구들이 보이지요? 머리에 꽃을 꽂은 맨발의 여인들은 모두 자연의 품속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과일은 그녀가 직접 딴, 그녀의 일상일 것입니다. 그녀를 보니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자연, 자연입니다.
고갱은 순수한 프랑스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혈관엔 페루인의 피가 흘렀고, 그의 삶엔 페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하고 내성적이었던 고흐와는 달리 끝까지 오만했던 그가 문명의 땅을 떠나 타이티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피의 부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은 산에 기대 살던, 혹은 바다에 의지에 살던, 혹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시절을 상기시킵니다.
내 피 속에는 강원도가 있습니다. 동생이 산촌으로 이사를 했을 때 반가웠던 이유도 바로 고향을 느낄 수 있어서, 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지난 겨울, 거기서는 잠시,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끊겼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오려던 나는 처음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하겠습니까? 목숨 걸고 세상으로 나올 일은 아니니!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우며 차분해졌는데, 의외로 그 고립이 좋았습니다. 하염없이 내린 눈 때문에 도시에선 난리였다는데, 나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나를 도시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 눈이 좋았습니다. 그 3박4일, 나는 산촌에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이상하지요? 고갱의 저 그림을 보는데, 불가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 그 때 그 시간이 겹쳐지는 것은. 아마도 문명에 익숙한 나는, 우리는 문명에 지쳐있기도 한 모양입니다. 고갱의 그림은 문명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문명을 향유하는 단순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자연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세례를 받지 않고 인간일 수 없습니다.
사실 매너 좋은 도시인으로 깔끔하게 살아간다 해도 문득문득 갑갑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갑갑함은 삶이, 혹은 운명이 내게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속에 살다 도시인으로 죽었다는 문장 속에 내가 있다면? 그건 숨이 막힙니다. 자연을 모르고는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우리는! 살아있는 흙 위를 다녀야 하는 건 뱀만이 아닙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하는 건 독수리만이 아닙니다. 햇빛에 자신을 온전히 여는 건 그림 속의 저 나무들만이 아닙니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50) 피터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0) | 2018.08.26 |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8) 마르크 샤갈 ‘떨기나무 앞의 모세’ (0) | 2018.08.26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7)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0) | 2018.08.26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6) 에드바르 뭉크 ‘절규’ (0) | 2018.08.26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5) 장 프랑수아 밀레 ‘접붙이는 농부’ (0) | 2018.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