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념의 시간에 만난 신
렘브란트의 밧세바는 고뇌하는 여인인데, 샤갈의 밧세바는 행복하게 다윗과 융화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샤갈은 부끄럼 없는 순결한 사랑의 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또 렘브란트의 모세는 심각한데, 샤갈의 모세는 온화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성서의 이야기가 나이 들면서 열매 맺은 방식은 그만큼 달랐던 거겠지요. 어린 시절부터 성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었다는 샤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와 같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저 샤갈의 모세를 보십시오. 여성성이 잘 발달된 부드러운 남자 아닙니까? 당신의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한 민족의 지도자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까지 성급했고, 상처 입었고, 무력했고, 고독했던 인간입니다.
저 그림은 떨기나무 앞의 모세를 그린 그림입니다. 신을 벗은 모세, 보이시지요? 샤갈은 신성에 반응하는, 신을 벗은 모세를 흰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심장에 오른손을 얹고 경이롭게 떨기나무를 바라보는 모세야말로 새로운 운명을 향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 같습니다. 샤갈은 그림의 배경으로 생명의 녹색과 신비한 파랑을 써서 모세가 만난 신성한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마르크 샤갈 ‘떨기나무 앞의 모세’ 1960~1966년,
유채, 195×312㎝, 국립성서박물관, 니스
그나저나 떨기나무를 보십시오. 불꽃은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줘서 눈에 들어오는데, 나무가 볼품없지요?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자라는 떨기나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시나무입니다. 덤불로 엉켜 사는, 메마르고 거친 광야의 증거지요. 제 눈물을 먹고 사는 가시나무에 신성이 깃든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스스로도 주목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모세의 마음밭은 아니었을까요? 모세의 힘은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보다 거기서 주님의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마음은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풍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도 정직할 때, 스스로 움직여 세상을 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체념과 절망으로 황폐해져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어린 날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가 이집트인이 아니란 것을 알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이집트 관원을 살해했던 게 아닐까요? 그 사건으로 화가 난 파라오가 모세를 잡으라는 명을 내리자 모세는 사막으로 도망칩니다. 모세의 정의감은 하루로 끝이 났습니다. 그 사건은 모세가 자기 능력으로, 자신의 격정으로, 자신의 정의감으로 일군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공이 생기기 전에 정의감이나 격정은 진짜 무력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망자 모세는 미디안이란 사막지역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유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아이를 얻고 나서 모세가 고백합니다.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이게 무슨 아들을 얻은 자의 고백입니까? 차라리 악몽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자의 한숨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모세의 삶이 얼마나 적막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40년을 살았습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을 모세는 기대도 없이, 희망도 없이, 눈물도 없이 그저 살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체념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를 본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을 때였지요.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는 불붙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타들어 가지는 않았던 거지요. 모세가 의아하게 여길 즈음에 거기서 모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비록 떨기나무처럼 존재감이 없는 삶, 황폐한 마음일지라도 어린왕자가 노을을 지켜보듯이 고요하게 지켜보고 있으면 거기서 신성한 불꽃이 피어올라 신을 벗게 할지도 모릅니다. 샤갈의 모세처럼 새로운 운명을 향해 ‘나’를 던져가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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