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나무가 있던 집 / 권대웅
모과꽃이 피던 봄이었어. 이 세상에 분홍빛으로 피는 꽃 중에서 나는 모과꽃이 제일 예쁘더라! 봉오리가 맺힐 때는 빨갛게 가깝고 꽃이 피면 분홍에 가까운 그 모과꽃 향기를 밤에 맡으면 마치 그것이 달향 같다는 착각이 들어. 가출하고 싶어. 그런 봄이었어. 모과꽃이 피어나는 창가에 누워 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벌떡 일어나 엉엉 울었지.
자다가 전생이 스쳐 지나갔던 거야. 꿈인 줄 알았는데 꿈 속인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래 전 뭉게구름 너머 하늘 저 언덕배기 모과나무가 있던 집 마당이 떠올랐어. 잠깐 다녀온다 하고 집 앞 길모퉁이를 한 번 돌았을 뿐인데, 꽃이 지는 길을 지났을 뿐인데 그만 까무룩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시간을 잊어버렸던 거야.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나는 어디서 무엇으로 살다가 이제사 자다가 깨어나 그 집이 생각난 것일까. 곧 돌아온다던, 밥 짓는 소리 두고 온 그 봄날의 집. 어떡하지. 여기서 그만 살림을 차려버렸는데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당신이 밥 차려놓고 기다리던 모과나무 꽃 피던 그 집이 생각났어.
꽃이 필 때마다 설렘보다 목멤이 먼저인 이유를 알았어. 바람이 공중에서 펄렁 불어올 때마다 그 소리가 울컥 목젖에 걸리는 이유를 알았어. 외로울 때마다 명치 끝이 아파왔던 이유, 땅거미가 질 때마다 몸이 쑤셔오던 이유. 누군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꾸 뒤돌아 보고 싶어질 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못 견디게 그리워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만 했을 때, 햇빛에 눈이 부셔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흐를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면 아니 없어지면 무엇으로라도 남아 있을까, 분자, 단자, 파장, 먼지, 물방울, 구름, 플랑크톤... 그러다가 어떤 에너지와 물과 불이 맞닿아 빚어낸 그 무엇으로 다시 오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남아 있던 간에 기억들 역시 응축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모래먼지 만한 아주 작은 채송화 씨앗 속에 미래의 채송화 꽃이 들어있듯이 채송화꽃이 필 때 불던 바람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 날아들던 나비의 입술이 응축된 기억으로 들어있을 거야. 그것이 유전자가 되고 습이 되고 닮은 꼴이 되는 거겠지.
전생의 그 기억들이 홀연 떠오를 때가 있어. 꿈도 아닌, 데자뷰도 아닌 실제 있었던 그 사실 말이야. 하늘이 기우뚱 무너지는 것 같다가 갑자기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것 말이야.
모과꽃 속으로 들어가 모과꽃 속 너머를 지나야 또다른 모과꽃나무가 있던 마당과 그 창가에서 기다리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텐데 지금 이 생은 모과꽃 지는 곳까지만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이어서 봄이어서 몸이 어서 그만 늘 꽃잎으로만 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렇게 홀연, 문득, 불현 듯, 우리 생이 불멸이라는 것을 알았어. 공간과 시간이 바뀌어도 당신과의 사랑은 불멸이라는 것, 달이 그러하듯 저 우주가 그러하듯이.
달항아리 가득 분홍 모과꽃이 뿌려지는 것 같은 달빛이 내려오고 있었어. 꿈 속에서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뿌려지는 꽃,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한나절 지난 것처럼 아직 저 생에서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당신에게 뿌려지는 꽃, 달꽃.
'이 세상에 분홍꽃으로 피는 꽃 중에서 나는 모과꽃이 제일 예쁘더라" 당신이 했던 말이 내려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