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우크라이나의 달

모든 2 2023. 9. 18. 14:26

 

 

우크라이나의 달 / 권대웅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어. 물질이 화학 반응에 의해 다른 물질로 변화하여도 반응 이전과 반응 이후의 질량이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는 법칙이야. 즉 물질이 사라지거나 무에서 물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형만 있다는 것이야. 종이 한 장을 태우면 종이는 없어지지만 재와 먼지로 남아 있다는 것처럼 말이야.

물질物質만 그럴까. 감정感情도 그래. 마음에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한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 감정이 변하거나 누구려졌어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더 기운을 가진 감정으로 남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

작용하고 있다는 것 말이야. 어떤 현상이나 운동을 일으키고 사물이나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고 영향을 미친다는, 그 작용作用말이야.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당신이 어딘가에서 그 무엇으로 남아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눈물 나지 않니? 이 세상을 살다가 없어질 내가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어떤 기운이나 그 무엇으로 남아 스르고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을 하면 두근거리지 않니?

 

동유럽의 알프스라고 하는 타트라 산맥을 버스를 타고 넘어간 적이 있어. 산맥을 넘는 동안 이 굽이 비가 내리고 저 굽이 해가 뜨고 구름이 끼다가 또 화창해지고 높은 침엽수림 숲 위로 무지개가 걸리고, 몇 공간을 통과해온 것 같은 그런 오월이었어.

버스가 산자락을 다 내여왔을 때쯤 마을이 보이고 작은 남새밭들이 보이는데 그 길에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바구니를 얹고 걸어오고 있었어. 아! 이곳에도 바구니를 사용하고 그것을 머리에 얹고 가는구나. 같은 문화가 흥미로워 오래 그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버스가 가깝게 마주치며 다가가는 순간, 깜짝 놀랐어.

어렸을 때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랑 똑같이 생긴 거야.

 

잘못 봤나. 비슷할 수도 있지. 창문에 이마를 묻고 다시 보아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 얼굴이었던 거야. 앞가르마를 타서 뒤로 묶은 머리. 그래서 닮아 보인 것일까. 그런데 그 공간 어딘가에서 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놀량패처럼 허랑방탕하게 산 4대독자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하며 가난하게 살던 할머니.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어린 내가 살아갈 날이 걱정되었던 듯 "얘야, 어떡하냐. 내가 더 살아 돌봐줘야 하는데.."

할머니가 마지막 남긴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되지.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지. 나는 너는 우리는 죽어서 무엇이 될까. 문득 죽어서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 영혼 그 상태 그대로 누군가에게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52세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영혼이 몸만 빠져나와 당신이 전생에 살던 익숙한 습習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것, 생각할수록 뭉클해져.

 

몇 해 전. 모 소설가 출판 기념회 북콘서트에 갔다가 게스트로 나온 분이 연주하는 아코디언을 들었어. 그곡을 듣는데 갑자기 마구 눈물이 나왔어. 처음 듣는 곡이었어. 왜 그랬을까. 곡명이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라고 했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얼마 전 새해 새벽 꿈을 꾸었는데 할머니가 나타나서 우크라이나로 가셨다는 말씀을 하셨어. 아!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어디에 있을까. 구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로 고려인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다지. 그 옆에 있는 벨라푸스와 함께 세계에서 미녀들이 가장 많다는 나라라지. 동유럽 타트라 산맥 아래 사시던 할머니는 왜 우크라이나로 가셨을까. 꽃이 피면, 따뜻해지면 우크라이나에 한 번 가보려고 해.

 

차가운 봄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을 때마다 아주 멀리서 온 편지 같아. 어느 공간을 뛰어넘어온 바람일까. 뺨에 쓰고 가는 이 문자가 때로 슬프고 아려 눈물이 찔금 난다. 상형문자처럼 아니 끼를문자처럼 뺨과 이마와 귀볼에 와 닿는 바람의 문자를 읽어보려고 해.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말이야.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차가운 봄바람이 뺨에 부딪힐 때마다

멀리서 온 편지를 읽는 것 같습니다

그 문장이 아파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나비가 펄렁 뛰어넘어 온 공간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 전나무숲

그 생 너머에서 내려오는 햇빛은

너무 슬퍼 차마 읽지 못합니다

찬란해서 눈이 부신 것이 아니라

어두운 것이 많아 눈부셨던 것이지요

봄바람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아코디언이 접혔다 펼쳐질 때 보이는

시냇물과 노을의 골짜기를 지나

언젠가 내가 울었던 그 자리인가요

너무 길어 쓰지 못한 당신의 사연처럼

땅속에서 아지랑이가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꽃 속에

빨간 사과 같은 당신이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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