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달 / 권대웅
성큼 또 다시 새해라지. 이 지구상에 새해는 도대체 몇 번째 오고 있는 것일까. 성큼! 이라는 말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어느 거대한 거인의 한 걸음 같아. 한 해가 떠나가버린 하늘 어디선가 거대하면서도 가벼운 다리 하나가 성큼 발을 디딘 것 같은 새해.
매양 우리 곁으로 오고 있었는데 문득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아 놀랄 때가 있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 홀연 세월에도 걸음이 있어. 선듯 선듯 내딛으며 오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그 한 걸음을 속절없이!라고 불러 봤어.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들 앞에 상처받지 말고, 상처주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살아. 새해에는.
자주 먼 나라에서 새해를 맞이하곤 해. 되돌아보면, 아니 멀리서 바라보면 내가 그토록 끙끙 앓고 고민했던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곤 해.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말처럼, 공간을 이동한 먼 거리감이 이해시켜주고 깨닫게 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살고 있는 촌락이라는 곳은 그저 손바닥만 한 곳이어서, 속절없이 정처 없는 곳이어서, 어렵고 힘들고 밉고 싫었던 것들에 대해서 측은지심이 들 때가 있어. 그것이 내 여행의 이유야.
멀리서 더 가깝게 다가가 보려는 것.
당신이 사라질 미래가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에 와서 나와 동시대를 살면서 부딪칠 수 밖에 없었던 그 과거 인연 같은 것 말이야.
베네치아였어, 양동이에 눈군가 비눗물을 잔뜩 담아와 비눗방울을 만들어 날리고 있었어. 뉘엿뉘엿 지는 저녁 하늘을 향해 커다랗고 투명한 비눗방울이 날아가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고 꿈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생에서 살아가는 것 말이야.
지게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았던 청춘, 어깨에 내린 비 한 바울에도 힘겨워 무릎을 꿇던 날도, 깨어나 눈을 뜨기 싫었던 아침마저도 모두 아름다운 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상에 악몽은 없어. 좋은 꿈과 나쁜 꿈. 이 두 수數의 부등호는 항상 좋은 쪽이 커서 안 좋은 것들을 자양분으로 흡수시키니까.
영화로도 만들어졌지.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중에 느끼게 될 슬픔이 지금 느끼는 행복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의 슬픔이 두려워서 지금의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
행복 안에 슬픔이라는 물방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면 슬픔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물방울인지 몰라.
인도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고 흔들리는 2층 좁은 침대칸에 누워 창밖을 보다 운 적이 있어. 밤새 기차가 낯설고 어두운 인도 땅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서 어둠 저쪽, 우주 어딘가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야. 새해였어.
내가 이 세상에 온 것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시 오지 못할 아름다운 꿈 같았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았어. 힘든 날도 가난했던 날도 외롭고 슬펐던 날 모두 아름다운 꿈이야. 잡히지 않으니까.
확인해 봐! 잡히지 않잖아. 꿈처럼.
겨울 처마 밑에 거꾸로 매달려 추위를 먹고 사는 투명한 고드름처럼 취위가 없으면, 그런 힘겨움이 없으면, 우린 그냥 금세 녹고 마는 거야. 비눗방울이 날아가고 있었어. 투명한 기억과 잡히지 않는 꿈으로, 내가, 당신이, 살다 사라지고 있었어.
학명 선사가 이런 시를 썼어
묵은 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나/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성큼 또 새해가 왔어. 어떤 때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성큼, 이라는 말. 찬물 같은, 선고 같은, 저녁의 흰머리 같은, 성큼성큼 눈이 오고, 성큼성큼 바람이 불고, 성큼성큼 잊혀지겠지.
사랑해 성큼성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