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달꽃밥

모든 2 2023. 9. 5. 11:47

 

 

달꽃밥 /권대웅

 

스물 살 적 시집와서

우리 엄마가 처음으로 지은 꽃밥

밥알 한 알 한 알 어루만진

그 마음씨 너무 예뻐서

초저녁 하늘에 뜬 초승달이

한 그릇 빌려간

우리 엄마 달꽃밥

 

 

초저녁 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면 늘 배가 고파진다. 그 초승달 위에 얹혀진 집이 보이고 굴뚝연기가 올라오고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언제나 환하고 따뜻해서 그리운 저 달 창문.

 

"밥 지어 줄께!"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을 꼽고 싶다. 밥 지어 줄게 밥 먹고 가! 손수 밥을 지어준다는 행위에 내포된 따뜻함, 정성, 배려, 마음씨, 어루만짐... 그런 밥을 먹어 본 적이 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더 힘겹고 지치고 춥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 찾아갔던 그 집. 한옥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그분 집. 퀭한 몰골을 보았는지 그가 말했다.

 

"밥  지어 줄께!"

 

개다리소반이라는 것이 있다. 작은 밥상인데 다리가 개다리처럼 휘어졌다 해서 개다리소반. 그것도 나무가 아닌 플라스틱용으로 접었다 피는 소반. 그 밥상에 지어온 밥. 소반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소반(小盤) 짧은 발이 달린 작은 상, 소반素飯) 고기반찬을 갖추지 아니한 밥, 소반(蔬飯) 제대로 차리지 아니한 음식.

 

세 가지 모두 맞는 밥상이었다. 문간방 작은 툇마루 밑 구들방을 지피는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끓인 김치찌개. 김치를 길게 찢어 새우젓과 들기름을 조금 넣고 자글자글 끓여낸 옛날 김치찌개의 맛을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연탄불에 구운 김, 고추장, 콩장 그리고 석유곤로에서 막 지어서 넓고 큰 사기그릇에 담은 밥,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게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진수성찬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그 연민과 숱한 말 그리고 알 수 없는 목메임...

 

그런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은 이제 또 다시 그런 밥을 얻어먹지 않고 그런 밥을 지어주거나 사주는 법을 알게 한다. 마음이 담긴 따뜻한 밥 말이다.

 

밥, 밥벌이, 밥상, 밥 한 번 먹자. 나는 살아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일차적 목적이 이런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이 말한 '살아 있는 것들을 상정하는 일차적 목적이 이런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이 말한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라' 이 말의 속성 역시 밥벌이와 배부름의 즐거움을 담고 있다. 행복하려면 배가 고프지 말아야 한다. 한파에 먹이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도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밥 짓는 냄새에 담장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에게도 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밥들이 있다. 진수성찬이 아니어도 참 따뜻했고 목이 메도록 감동스러웠던 밥 한 끼의 추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그런 밥들을 달꽃밥이라 부른다. 영혼을 채워주었던 환한 밥, 어두워져 가는 불안한 마음에 따뜻하게 뜬 밥, 달꽃밥.

 

저녁이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처럼 밥이 수북이 담긴 밥 그릇처럼 부풀며 떠오르는 달.  밥 먹고 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배고픈 짐승들과 허공을 떠다니는 영혼들을 제도하고 끼니를 알리기 위해 치는 운판(雲版)처럼 사위어가는 어둠 속에 뜬 달꽃밥.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밥 굶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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