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꽃 속의 달

모든 2 2023. 9. 18. 12:17

 

 

꽃 속의 달 / 권대웅

 

우리가 사는 이 공간 어딘가 분명 다른 버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종종하곤해. 라디오를 틀고 주파수를 맞추면 진행되고 있는 목소리와 음악이 나오듯이, 텔레비전을 틀고 채널을 돌리면 드라마의 영상이 보이듯이, 이 공간 어딘가에 이 세상을 살다갔던 사람들과 그 이야기들이 동시대별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며 거기 와글와글 모여 자신이 사는 모습과 생각들을 수없이 올리고 있는 페이북이나 트위터 같은 공간처럼 말야. 그렇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비밀번화는 무엇일까. 어느 주파수, 몇 번 채널에 맞추어야 당신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바위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 말할 수 없었던, 내보일수 없었던 모든 침묵이 그곳에 저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왕왕 하곤 해. 입을 막고 눈을 감아야했던 것들 말야. 바위가 되어 영원히 봉인돼버린 거지. 인간이 살면서 알면 안 되는 이야기, 보면 안 되는 것들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바위 속에 밀봉되어 있다는 생각이 왕왕 들어.

인간의 눈과 사고로 바라보았을 때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만 바위 속에도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을 거야. 바위 속을 날아가는 새들, 헤엄치는 물고기들, 아직 오지 않은 희망들.

아아, 저 딱딱한 바위를 풀어헤치고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회는 무엇일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굳게 닫혀있던 당신의 마음을 풀어, 당신의 옷고름을 풀어내어, 당신의 분홍 가슴 따뜻한 속살로 파고들듯, 무뚝뚝한 그 침묵을 여는 코드는 무엇일까.

 

책의 갈피가 있듯이, 계절과 계절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갈피가 있다는 생각이 때때로 들 때가 있다. 여름이 끝나가는 길목 오후 두 시에서 세 시로 넘어가는 빈 골목길에 물끄러미 서 있는 적막 같은 것. 먼동이 트는 인적 없는 한겨울 창밖에서 누군가 밤새 나의 창을 바라보고 간 듯한 텅 빈 흔적 같은 것. 땅거미가 질 무렵의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돌아보는 젖은 눈망울 같은 것.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이쪽으로 오지도 저쪽으로 가지도 않는 것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공간 속의 회한과 연민, 그런 울음 같은 것 말야. 그 갈피를 펼쳐 다른 페이지로 넘겨주려면 어떤 기도가 필요할까. 어떤 절실한 기도가 필요할까.

 

올여름 마당에서 피어나는 하얀 박꽃 향기를 맡다가 그 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어. 상큼한 물향기를 따라 꽃 속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이 공간 어딘가 꽃에게로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봄꽃은 봄에 오고 가을꽃은 가을에 오듯, 저마다 오고 또 가고 있는 투명한 길 말야. 분홍 꽃 오는 분홍 길, 붉은 꽃 오는 붉은 길, 수천 수억 갈래의 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엉키고 중첩되면서 오고감을, 피고 짐을, 잇고 있었어, 이어주고 있었어. 다행이야. 만물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드넓은 인드라망의 길을 볼 수 없어서.

 

이 공간에 존재하는 다른 버전을 여는 것, 바위의 오랜 침묵을 풀어내는 것, 그리운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볼 수 있는 주파수와 채널을 맞추는 것, 갈피를 넘겨 주는 것, 그 비밀번호는 바로 꽃이 아닐까 생각했어. 마른 나뭇가지에서 봉오리가 맺히고, 꽉 다문 입술을 절대로 열지 않을 것 같던 봉오리가 열리며, 수십 겹 꽃잎 피어내는 꽃, 그 향기 말야. 꽃이 오고, 꽃이 피어나고, 꽃이 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답이 아닐까 말야.

 

꽃이 피고 꽃이 지네

이 문장 속 꽃의 문법을 나는 지금 알아가고 배우는 중이야.

꽃 속에 달이 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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