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 꽃 / 권대웅
비가 그치고나자 마지막 피어난 꽃이 후드득! 저 달의 못에 가 닿는다. 고요하다. 그렇게 또 한 봄이 끝난다.
한 생이 건너간다.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듣고 보았던 모든 말, 풍경, 기억들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고! 요! 하! 다! 달에게로 간 꽃처럼... 그래서 나는 때로 어떤 말 앞에서도 고요하고 어떤 풍경 앞에서도 고요하다.
108개의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어. 고요한 달항아리 속을 듣고 싶었어. 달항아리 속에 존재의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문득 그 안에 달이 있을 것 같았어. 둥글고 아름답게 빚어진 달항아리의 자태 말고 그 안의 둥근 공간 말야.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보일까, 내가 인간의 씨앗으로 형성되어 이 세상으로 오고 있는 것, 그 너머 무엇으로 살았던 생의 공간이 보일까. 당신이 나에게 지었던 마지막 미소가 보일까.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이 우리가 살아내며 했던 말들이 들릴까.
엄마의 자궁 속에 들어앉아 살면서 코가 생기고 입이 만들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나고 동공이 생기면서 들었던 고요한 말, 보였던 저 너머의 세계가 점점 사라지고 엄마의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 지구라는 공간의 중력에 살 수 있게 만들어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모두 달항아리 안에 들었던 비밀을 잊어버렸어. 그래서 울었을 거야.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잃어버려서 말야.
달항아리 속에 담겨 있던 말이 무엇일까. 텅 비어서 가득 찬 그 말, 어쩌면 별것도 아닌 아주 쉽고 단순할 것 같은 말. 달항아리를 그리면서 그 말을 찾아내려 하고 있어. 그 메시지를 기억해내려 하고 있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렵고 슬프고 고단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반댓말이 들어 있을 것 같았어. 아무것도 아닌데 이 세상에 와서 괜히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살 필요가 없다는 그것들의 총체적인 메시지. 108개의 달항아리를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의미는 무한함이야.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 안팎의 구분이 없는 것. 이 공간 속의 저곳,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오버랩되며 오고 가고 연결되고 이어지는 것, 있으면서도 없는 것, 그것이 우주라고 생각했어. 달항아리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어.
완전하게 둥근 원도 아닌 약간의 구부러진 듯 긴 듯한 부정형의 원이 주는 순박함 그 달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비밀, 모든 삶에 진리는 없어. 있지만 없을 뿐,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야 해.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해.
텅 빈 공간 안의 메시지는 고요하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서 오듯이 나무에서 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서 오듯이 진리는 고요한 침묵이다.달항아리에 꽃을 꽂았다. 달항아리 속에 침묵하던 말들이 꽃으로 피었다. 고요한 침묵의 달항아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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