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달의 고요

모든 2 2023. 10. 12. 15:45

 

 

달의 고요 / 권대웅

 

비가 오고난 후 여름밤 하늘에 뜬 달을 보면 참 고요하고 환한  연못 같아. 저것이 바로 명상이지. 경전經典이지. 달에 적힌 저 경 經을 봐. 달빛이 읽고 있는 경 經을 들어 봐.

그 달이 비추는 지상의 연못에 연꽃이 피어나고 있어. 후드득 연꽃이 날아가 달에 닿고 있었어. 누가 놓고 가는 생일까. 이제  막 떠나가는 순간과 탄생하는 순간이 겹쳐지는 시간에 닿는 것 같은 달의 고요. 달팽이가 아득한 은하수를 건너가고 있었어. 배낭을 맨 여행자 푸른 구름들이 잠시 달에 짐을 풀고 머물고 있었어. 연못 속에 비친 달을 찾아 한평생을 가는 달팽이처럼 우리 삶이 그런 것 같아. 있으면서도  없는 것, 보이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 존재하면서도 없어지는 것, 언젠가 모두 사라져 가는 것을 향해 우리가 가고 있는 거야. 아름다워서 슬픈 한 여름밤의 꿈 같은 것. 환영幻影이야.

 

하루종일 비가 왔다. 그친 여름밤이면 그 빗줄기가, 빗소리가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풍경을 모두 없애버리고 간 것 같아.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 뜨거운 열정으로 차오르던 일, 때로 힘겹고 안타깝던,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어젯밤 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60갑자甲子가 하루인 것 같은,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여름꽃들이 피었어. 여주꽃, 봉숭아꽃, 조롱박꽃, 호박꽃, 해바라기, 백일홍, 나팔꽃, 수국... 오랫동안 인간 곁에서 피어왔던 꽃들이 나는 좋아. 이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할 것 같아서야. 어쩜 그들이 보던 꽃으로 다시 온 것이라는 생각도 해. 손바닥 마당과 화분에 심은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가진 말들로 피어나고 있어. 아침에 눈뜨자마자 마당으로 나가서 꽃들이 하는 말들을 들으려고 귀기울이고 있어. 어쩜 땅콩꽃은 저렇게 진노랑으로 올까. 너무 노랗게 피어서 목이 매어. 밤에만 피는 하얀 조롱박꽃에 코를 대면 시냇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 소리를 따라가면 맑은 물냄새.

 

봄에는 꽃씨들을 심을 때마다 씨앗에 소원을 빌며 흙 속에 묻곤 해, 꽃씨가 땅을 뚫고 나와 싹이 트고 자라 꽃이 피면 마치 내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아. 그 꽃 속으로 붕붕 벌들이 오고 나비들이 날아올 때마다 나는 그 날개에 소원을 말하곤 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들이 다니는 공간에 소원을 피어나게 해줄 것만 같아서. 꽃들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꽃과 나무들의 이름을 배우고 친해지려 하고 있어. 미숙이, 현숙이, 영희, 준성이, 경수, 명철이... 우르르 몰려다니던 그런 이름들을 잊어버리고 꽃과 나무들과 벗이 되는 나이가 아니 시간들이 오고 있어. 조용히 그 벗들과 사귀려고 해.

 

달 속에 여름이 머물고 있어. 소나기가 오고 무지개가 뜨고 꽃들이 피었어. 비가 그친 후 뒷산 숲속에서 뜨겁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다보면 어둠 속에 마치 별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소리 같아. 개구리들이 경전을 읽고 있는 것일까. 그 소리를 들으며 그것들이 오고 피어나고 떠나는 것들을 바라보며 달이 떴어. 눈물이 났어.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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