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사라지는 것들 / 권대웅
집 앞 마당에 서 있던 해바라기가 사라졌어. 불이 득실한, 아주 넉넉한 웃음을 가진 듯 생긴 둥근 해바라기였는데 담장 아래 고개를 푹숙이고 있다가 그만 팔월 그 여름의 태양을 따라 갔나 봐. 허전했어. 아침저녁으로 창문에서 바라보던 꽃이었는데. 해바라기가 유독 키가 커서 그랬지 사라진 것은 비단 해바라기 꽃만이 아니었어. 봄, 여름, 가을, 매 계절마다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들을 보고도 우리가 영원할 줄만 알다니, 언젠가 사라질 것을 잊고 있다니, 나도 당신도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높고 멀어져 가는 하늘 위로 뭉게뭉게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어.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몇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다가 흑백사진 위에 씌여져 있는 글을 보았어. 아마도 분명 환하게 웃고 있을 두 부부의 즐거웠던 한 때의 사진들만 모아놓았는데 눈 밑에 코와 입 부분이 흑백칠판 지우개로 지운 듯이 지워지고 이런 문장이 씌어 있었어.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어. 우리는 모두 없어지는 것들이야. 나도, 당신도, 무더웠던 이 여름 거리로 뿜어져 나왔던 갈망. 열망,슬픔,웃음, 기쁨, 성공마저도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야. 돌아오지 못할 것들이야.
아무리 더워도 가을은 오고 겨울이 오고, 추운 한파가 몰아쳐도 봄은 온다. 기다렸던 휴가와 즐거웠던 여행도 끝날 것이고 힘겨웠지만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야. 우리는 모두 지금 그곳을 향해 지나가는 중이야. 구름도 지나가는 중이고, 당신들과 만나 즐겁게 노는 것도 지나가는 중이고,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당신을 껴안고 있는 것도,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도 지나가는 중이야. 잠을 자고 있는 것도, 꿈을 꾸고 있는 것도, 불을 켜는 것도 지나가는 것들이야.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흘러 우리는 모두 어느 묘지의 상형문자가 되는 것일까.
얼마 전 강원도 정선 매둔 동굴에서 2만9천 년 무렵의 인류 손가락 뼈마디와 당시 인류가 쓰던 그물추, 물고기 뼈도 나왔다지. 둘째 혹은 셋째 손가락 세 번째 마디에 해당하는 1센티 가량의 뼈 마디. 아 그 손가락에도 반지를 꼈을까. 당신과 언약을 하며 주고받았던 반지 말이야. 누군가를 어루만지고 보듬었을 그 2만9천 년 전 손가락 뼈마디가 보고 싶어졌어. 살아가는데 답이 어디 있겠니. 우리가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 말야. 고민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인생에 굳이 답을 얻으려 애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스승의 말도 그 어떤 진리에도 정답은 없어. 오직 지금 이 순간, 잘살고 행복해지는 것. 멀리 떠나서 보자. 꽃과 나무와 계절을 살펴보자. 거기에 각자의 모든 답이 있어. 우리는 모두 사라지는 것들이야. 없어진다는 것들이야. 여름의 눈사람처럼.
당신이 이 세상에 와서 참 따뜻했으면 좋겠다. 때로 힘들고 슬프고 외롭고 아프더라도 그것을 행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고 편들어주고 그러다가 미워하고 싸우고 화내던 당신. 시냇물처럼 웃고 울던 당신. 옛날에는 없었던 당신. 지금에만 현존하는 당신. 여름의 눈사람처럼 언젠가는 이 세상에 없을 당신.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참 행복했으면 좋겠다. 소망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어두워도 환하게 사는 당신. 없어도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당신. 착해서 가난한,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