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어지는 것 / 권대웅
비가 내리는 소리는 자연이 연주하는 음악 같아. 가만히 빗소리를 들어봐. 비가 부딪히는 곳마다 서로 다른 빗소리들을 들어봐. 통통통 처마 밑에 놓은 깡통에 부딪히는 빗소리. 두둑두둑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소리 톡톡톡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이 어디에 부딪히느냐에 따라 그 음향과 질이 달라지듯이 우리도 어느 곳에서 누구와 부딪히고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소리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만나서 어떤 소리를 내고 있니?
빗소리가 둥글다고 생각했어. 아니 이 세상에 오는 모든 것들은 둥글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동그란 몸짓을 지으며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자기 몸이 매달려 있을 동그란 자리를 허공에 만들고 둥근 알에서 날개를 둥글게 퍼덕이며 어린 새가 태어나고 있어. 방울방울 둥글게 내려오는 눈부신 햇빛, 나뭇잎도 둥글어지고 여름도 둥글어지고 있어. 둥근 언덕 바람을 넘어오는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 둥글고 구구구 산비둘기 울음소리 둥글어 둥글고 둥근 메시지로 가득찬 공간에 홀연 나비 한 마리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어. 우리가 살면서 만나고 부딪히며 소리내는 것들은 왜 둥글지 못할까. 왜 뽀족하고 날카롭고 모가 나 있는 걸까. 눈과 코 입 그리고 이마까지 둥근데 왜 마음의 눈과 코와 입은 삐뚤어진 것일까.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이 생을 살아내면서 저마다 받은 상처, 실연하고 실패하고 떨어지고 좌절한 충격들 그것이 상처가 되어 둥글어져야 할 마음을 틀어놓은 것일 거야. 방어력과 면역력 그리고 풍부한 경험이 생겼지만 그것이 생김새 즉 표정, 미소, 눈빛 하나, 말 한마디, 마음씀 같은 것들은 둥글어지지 않았어. 상처를 둥글게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해,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진주로 만들어내는 진주조개처럼 이 생에 와서 살면서 받은 상처를 둥그러지게 만드는 공부 말이야. 그래서 품성을 쌓고 품격을 높이는 것, 직급이 오르고 계급이 오르는 것만이 아니라 키가 크고 몸이 성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결도 높아지는 것, 그렇게 아름답게 둥글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아닐까.
뒷산 숲에서 구구절절하게 울어대는 산비둘기와 뻐꾸기 울음 소리들을 듣다가 홀연 공간에도 멍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멍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빗방울에 섞이고 달빛에 발효되어 연금술사처럼 여름꽃을 피우고 찌르레기와 어치 산새알을 깨우고 세상에 살았던 모든 것들을 되살려내는 거라는 것을 알았어. 그런 멍을 상처 울음마저도 둥글어져서 다시 오고 있었어.
비가 오고 있어.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어. 비가 내려와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것들과 부딪힐 때 나는 소리, 호호 깔깔 낄낄 흑흑 엉엉 흐흐 하하 허허... 너는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 어떤 소리를 내며 살고 있니, 내 마음은 어떤 생각과 부딪혀 어떤 소리를 내며 살고 있을까. 둥글어지고 싶어. 둥근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비내리는 저녁, 봉은사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은, 둥근 여여如如한.
꽃 받으세요. 외로웠으니까. 힘들었으니까. 그동안 잘 견뎠으니까. 아무 일 없듯 웃었으니까. 꽃이 피고 꽃이 질 때까지 울지 않았으니까.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져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당신 꽃처럼 아름다웠으니까. 환하고 둥근, 달꽃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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