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19

달 매화

달 매화 / 권대웅 찬바람을 맞고 피어나는 매화의 깊고 은은한 향기는 어딘가를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거쳤다가 돌아온 생 같아. 맨몸 맨살로 돌아와 추워도 춥지 않은 그 빙옥氷玉의 언어들. 추위 속에 향기를 자아내는 매화는 꽃이 아니라 정신이야. 겨울밤 달빛 아래 매화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어. 달빛과 매화의 색깔이 같은 데도 명징하면서도 고고한 정신이 서로 맞닿아 어떤 경지와 절정 이른 것 같았어. 삼매三昧에 들었다는 것이 저런 것일까. 오래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세상에 모든 아픔과 슬픔 힘겨움을 겪어내는 것에는 향기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 뼈에 사무치도록 혹독한 추위를 겪은 후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은 매화처럼 말이야. 추워서 더 명징하고 슬프고 아팠기 때문에 더욱더 향기로워라.당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권대웅의 달시 2023.09.18

꿈 속의 달

꿈 속의 달 / 권대웅 성큼 또 다시 새해라지. 이 지구상에 새해는 도대체 몇 번째 오고 있는 것일까. 성큼! 이라는 말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어느 거대한 거인의 한 걸음 같아. 한 해가 떠나가버린 하늘 어디선가 거대하면서도 가벼운 다리 하나가 성큼 발을 디딘 것 같은 새해. 매양 우리 곁으로 오고 있었는데 문득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아 놀랄 때가 있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 홀연 세월에도 걸음이 있어. 선듯 선듯 내딛으며 오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그 한 걸음을 속절없이!라고 불러 봤어.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들 앞에 상처받지 말고, 상처주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살아. 새해에는. 자주 먼 나라에서 새해를 맞이하곤 해. 되돌아보면, 아니 멀리서 바라보면 내가 그토록 끙끙 앓고..

권대웅의 달시 2023.09.18

꽃 속의 달

꽃 속의 달 / 권대웅 우리가 사는 이 공간 어딘가 분명 다른 버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종종하곤해. 라디오를 틀고 주파수를 맞추면 진행되고 있는 목소리와 음악이 나오듯이, 텔레비전을 틀고 채널을 돌리면 드라마의 영상이 보이듯이, 이 공간 어딘가에 이 세상을 살다갔던 사람들과 그 이야기들이 동시대별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며 거기 와글와글 모여 자신이 사는 모습과 생각들을 수없이 올리고 있는 페이북이나 트위터 같은 공간처럼 말야. 그렇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비밀번화는 무엇일까. 어느 주파수, 몇 번 채널에 맞추어야 당신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바위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 말할 수 없었던, 내보일수 없었던 모든 침묵이 그곳에 저장되어 있다는 생..

권대웅의 달시 2023.09.18

달새

달새 / 권대웅 한 달에 한 번식 밤하늘에 달을 낳고 가는 새는 얼마나 클까 우리는 왜 너무 큰 것은 보지 못하는 걸일까 새가 달을 낳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뒤척였을까 하늘에 펼쳤던 저토록 큰 검은 날개 새벽이면 어디에다 접어 넣을까 날개를 펼칠 때 반짝이던 별들은 어디서 얻은 상처들일까 이제껏 밤하늘에 태어났던 둥근 달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달에서 나오는 환한 기운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달에 들어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까 지붕 위에 달이 왔는데도 나는 얼마나 어두운 밤을 지냈을까 저 거대한 새가 둥글게 품고 있었는데도 나는 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달의 중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바닷물을 밀고 끌어당기는 조수간만이 아닌 달의 에너지 말이야. 달이 우..

권대웅의 달시 2023.09.15

달꽃밥

달꽃밥 /권대웅 스물 살 적 시집와서 우리 엄마가 처음으로 지은 꽃밥 밥알 한 알 한 알 어루만진 그 마음씨 너무 예뻐서 초저녁 하늘에 뜬 초승달이 한 그릇 빌려간 우리 엄마 달꽃밥 초저녁 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면 늘 배가 고파진다. 그 초승달 위에 얹혀진 집이 보이고 굴뚝연기가 올라오고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언제나 환하고 따뜻해서 그리운 저 달 창문. "밥 지어 줄께!"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을 꼽고 싶다. 밥 지어 줄게 밥 먹고 가! 손수 밥을 지어준다는 행위에 내포된 따뜻함, 정성, 배려, 마음씨, 어루만짐... 그런 밥을 먹어 본 적이 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더 힘겹고 지치고 춥고 무엇보다 ..

권대웅의 달시 2023.09.05

파란여름 달공작

파란여름 달공작 / 권대웅 마음에 떠있는 그리운 별과 달을 당신 잠든 밤하늘 꿈 속에서 활짝 펼쳤다가 새벽이면 고요히 접는 파란하늘 달공작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싶었어, 어릴 적, 산동네 창문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 그 속에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아. 양탄자를 타고서 그 별의 창문을 들여다보고 싶었어. 작은 오두막별 창문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하모니카를 부는 소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 갔다 돌아와 늦은 밤 앉은뱅이 책상에서 숙제를 하는 여학생이 저 별에도 분명 있을 것 같아. 그들을 위로하러 가고 싶어. 나는 간절하게 양탄자가 필요했어. 그 꿈을 이루고 싶어 시인이 된 것 같아. 동화를 썼던 것 같아. 외롭고 가난한 것에 대한 연민 같은 것 말이야. 다락방에 엎드려 '보물..

권대웅의 달시 2023.09.05

달빛 바느질

달빛 바느질 / 권대웅 수백 년 수천 년 전에도 저 달을 바라보던 눈들을 생각하면 밤이 하나의 긴 통로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 일직선에 깃들여 살며 이생도 저생도 달 아래 모두 한 공간 한 동네 어떤 마음자리였을까 굽이굽이 사무친 말과 옹이 진 사연 풀잎 같은 눈물이 저기 저리 모여 환하구나 연못에 얼굴을 들여다 보듯 서로 달을 바라보던 인연 어느 생에서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때로 너무 오래되어 헤진 사연 잊혀질까 달빛이 꿰매고 있다 달에는 국경이 없다. 시간과 공간도 없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과 저곳에서 바라보는 달이 같으니 달 아래 모두 한동네다. 오늘밤 바라보는 달과 백 년 전 아니 천년 전 살던 사람이 바라보던 달이 같으니 달빛으로 우리는 이생과 저 생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경계가..

권대웅의 달시 2023.09.05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권대웅 누가 환생을 하는가 보다 환한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제삿날 피우는 향처럼 가득하다 목이 메인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 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선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밤에 피어나는 연꽃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달이 환하게 떠 있던 여름밤이었습니다. 어둠 속을 달빛이 계단을 밟듯 사뿐 내려와 연꽃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그 연꽃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문득 달빛이 연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연꽃 속에서 달이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 고요한 이 밤에 달과 연꽃이 서로 만나 연..

권대웅의 달시 2023.09.05

싸리꽃 필 무렵

싸리꽃 필 무렵 /권대웅 저녁밥 지으려 부엌에 갔던 엄마가 쌀독에 쌀이 떨어져 쌀 대신 뒷동산에서 꺾어온 싸리꽃 그 향기에 불을 켜지 않아도 마루가 환했고 더웠고 목이 메이던 봄 꽃은 땅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속에서 피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곳 속 저 너머 보이지는 않지만 봄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부신 햇빛이 내리쬐는 또 다른 공간의 버전 속 어딘가에서 오는 것이다. 전생에서 오는 것이다. 개나리는 노랑 길로 온다. 진달래는 분홍 길로 온다. 벚꽃은 연분홍 길로 왔다가 다시 온 길로 돌아간다. 꽃은 지는 것이 아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봄이면 자기가 살던 그리운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저 공중의 꽃길을 따라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꽃들이 오고 가시는 길. 봄이면 얼..

권대웅의 달시 202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