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싸락눈/ 정양

모든 2 2018. 6. 17. 16:22

 

싸락눈/ 정양

 

검불 덥힌 마늘밭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밑

손가락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또 어디를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희끗희끗 또

싸락눈이 내린다

 

  - 정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중에서 -

 

   배고픈 아이들의 겨울이 마치 먹을 것 없는 고라니의 배회처럼 쓰리다. 견딤의 비감이 명징하게 채색되고, 어두운 메시지가 들어앉아 있음에도 한줄기 애틋한 그리움이 선명하여 얼핏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 비감의 유연함이 현실의 어두움을 환상 속의 밝음으로 이끌어 가는 듯 읽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10년 전 중국의 동북지방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그곳 헌책방에서 발견한 북한 문학계간지 <통일문학>1994년 봄호에서였다. 평양인쇄공장에서 인쇄하고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한 이 과월호 잡지에는 이 작품 말고도 곽재구와 정일근을 비롯 남쪽 시인의 여러 시가 소개되었고, 박경리의 '토지'가 수정 없이 연재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잡지는 작가 황석영이 방북할 당시 북한 문인들과 개인적으로 합의하고 동의하여 탄생한 잡지다. 남북한 문학이 분단 직후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로 이 잡지는 이러한 남북한 문학의 이질성을 극복한다는 명분아래 남한 문학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나 전위적인 실험주의를 억제하고 사회의 공적 쟁점을 부각시키는 현실주의적 경향을 지향하는 내용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통일이라는 목표와 목적을 두고 참여문학을 시행해 나가자는 취지로 발간된 문예지라지만 소개된 문학작품은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자기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글들이 주로 다뤄졌을 것이고 정양의 '싸락눈' 역시 배고픈 남쪽의 아이들을 묘사하는 듯한 작품이라 당시 북측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지난 해 우여곡절 끝에 국내 반입된 <통일문학>은 6·15민족문학인협회 기관지 창간호임을 명시하였으나 사실은 북측에서 발행해온 기존의 <통일문학> '통권 제75호'의 다름 아니다. 부디 남북문인들이 합의한 대로 체제의 모순을 뛰어넘는 곧은 ‘통일문학’의 지평을 열면서 남한의 다양한 작품들도 저들에게 가감없이 읽혀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