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빛 신민이었다 / 김복연
대구광역시 불로동에는 고분군이 있고
그 안에는 달빛 왕국이 있다
삼국시대 즈음
확실하지 않는 어느 고대부터 지금까지
달을 숭배하는 그 곳은
달 모양으로 빚은 수백 채의 봉분들
또 집집마다 태기가 있거나 만삭이어서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내가 숨이 먼저 차는 그 곳은
기이하게도 생리혈 비치는 날인데
이런 몸끌림의 난감함도 잠시
이미 나는 달빛 신민이었던 것처럼
복식호흡은 물론이고 내 몸 구석구석
내가 모르는 어느 전생의 슬픔까지 적시는
무장무장한 달빛,
결국 나는 만월로 둥둥 떠
하염없이 고요하거나 깊어지는 것이다
이런 다음날은 어김없이
고분 한 채가 사라지거나 늘어나는 것을
달빛을 밴 나만 알고 있다
- 시집 <그늘/ 2007,문학의 전당> 가운데 -
텔레비전의 한 퀴즈프로 문제에 거액의 상금이 걸렸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를 묻는 문제였고 3개의 보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거였다. 마지막 남은 두 명의 출연자는 아쉽게도 정답인 ‘도동 측백수림’을 피해 다른 오답을 찍고 말았다. 그 천연기념물 1호가 있는 곳으로부터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이 불로동 고분군이 있다. 측백수림도 잘 모르는 판에 이 고분군을 알기는 쉽지 않겠다.
시인은 발품을 팔아 시를 쓰는 걸로 유명한데, 거소가 그곳에서 멀지 않아 이 시를 쓰기 위해 원족을 가기는커녕 아예 그곳에 왕국 하나를 지어버렸다. 고분군은 가보지 않은 사람에겐 무슨 무덤덤한 무덤의 집합. 공동묘지쯤으로 상상할 수 있겠는데 그것도 달빛 왕국이라니 월하의 공동묘지라니....
하지만 안심하시라. 어느 공원 보다 적정조도에 훼방 없는 바람이 사시사철 솔솔 불며 풀잎향기를 실어 나른다. 물론 달빛이 더 많이 머물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만삭의 봉분을 보았지만 어느 각도에서 어떤 피사체를 볼라치면 풍만한 D컵 사이즈의 가슴을 다 드러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수태환경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
그런데 시인이 '몸끌림'으로 ‘무장무장한 달빛’에 ‘어느 전생의 슬픔까지 적시는’ 것 까지는 좋은데, 달빛왕국의 정체를 이렇게 커밍아웃 해도 하자가 없을 지는 모르겠다. 불로고분군은 시인에게 잠자는 고분이 아니라 천 년을 넘게 이어온 깨어있는 그만의 달빛 왕국이었으며, 시인은 물론 그의 신민이었다. 자유 시민이 아니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도무지 없는 신민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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