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국/ 김정호
노을이
금용사 뒤 능선에서
한껏 심지를 태우고 있다
스님의 이른 저녁
들레 밥상에서 토란국을 먹는다
그런데 아무리 저어봐도 토란이 없다
넒은 잎 비가려 쓰던 그 대궁으로
울 엄마 맛내던 토란국도 아닌
외할머니 얼얼하게 빚어낸 알토란도 아닌
그냥 토란 전분으로 무덤덤하게 끊여낸
내용 없는 토란국을
이 저녁 스님은 내게 법문 던지듯 내어놓으셨다.
저녁예불 목탁소리 어스름에 잠기고
그 여운 수국 맴돌다 함께 떠나는 바람처럼
- 계간 문학예술 2008년 가을호 -
특별히 장만한 명절의 특식이라야 추석의 송편이나 설날에 먹는 강정과 떡국 정도겠는데, 그것 말고는 달리 먹어본 기억이 까마득해서 토란을 설날에 먹었는지 추석날에 먹었는지 아리송하다. 숟가락으로 썩 칼질을 하면 부드러운 속살이 저항 없이 결대로 미끄러져, 입안으로 옮겨 넣으면 사르르 무너지는 식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추석날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감별력으로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분명히 감자보다는 한 품격이 더 있어 보였다. 생각난다. 토란잎은 수련 잎사귀와 비슷하게 생겨서 이번엔 아주 더 어릴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토란잎 밑에 숨거나 토란잎을 꺾어서 쓰고 다니기도 했다.
시인이 절집에서 먹은 토란국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그 맛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맛뿐만 아니라 토란국은 전통적인 사찰음식 가운데 하나인데도 전분가루만으로 ‘무덤덤하게 끊여낸 내용 없는 토란국’이었으니 시쳇말로 무늬만 토란국인 셈이다. 꿀타래 같은 식이섬유의 질감도, 입안에서 뭉개지는 맛도 없으니 결코 맛있는 토란국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토란 없는 토란국에서 토란잎을 떠올리고 후드득 듣는 빗소리까지 들었다면 시인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서정적 상상력은 갖춘 것 같다. 게다가 ‘저녁예불 목탁소리 어스름에 잠기고 그 여운 수국 맴돌다 함께 떠나는 바람처럼’ 법문 한 줄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이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긴 해도 시인의 칭호를 덤으로 얻는다 해서 과욕이라 나무랄 사람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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