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행복론/ 최영미

모든 2 2018. 6. 17. 16:15

 

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 비평사. 1998> 중에서 -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름이 알려진 최영미 시인은 그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결혼하고 가장 빨리 이혼한 전력을 갖고 있는 독신이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서양사학을 공부했고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여 지금은 한 지방대학 강사로 나간다. 그는 80년대 초 고1때 장학퀴즈에 출연 차석을 차지해 당시 그 프로의 조연출자인 주철환 피디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더니 영화의 주인공 출연 교섭도 받은 바 있으며, 그동안 소설집도 두 권 냈다. 그녀가 첫 시집을 내자 가톨릭 신자인 그녀의 어머니가 자랑삼아 교우들께 시집을 돌렸는데 컴퓨터와 무슨 섹스도 가능하니,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 어쩌니 불온한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제보를 나중에 전해듣고 황급히 회수에 나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행복론은 첫 작품집에서 감지된 삶의 고행과 비관의 그림자와 비교하면서 읽을 때 얼핏 화해와 희망 그리고 낙관을 이야기 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동안의 다채로운 삶의 이력과 그 궤적의 결과에서 오는 필연적 피곤함에 조금 지쳐 보이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자발적 모험들이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고 밤을 새워 고민한들 나아질 게 없다는 인식의 흔적은 엿보여도 스스로 안전지대에 가 있겠다는 말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물론 그의 말대로라면 절대 촛불 따위는 치켜들지 말고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며, 남의 일(?)에 공연히 참견하거나 들쑤시지도 말아야 한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무얼까 라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가란다. 가되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도 주문한다. 

 

 그런데 이 행복론은 전적으로 다른 행복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의 형식을 취한 것도 아니라서 한편엔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아마 그만큼 사람들이 피곤하고 지쳐있다는 얘기지 싶다. 하지만 현실을 눈감고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다면 바로 편안함일 텐데, 편함이 곧 행복일 수는 없다. 니체가 말했다. 언젠가 날기를 원한다면 먼저 일어서고, 걷고, 달리고, 기어오르고, 껑충거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준비 없이 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느지막한 인생의 비탈에 선 우리 같은 사람에겐 그리 썩 와 닿거나, 의지를 불태울 격려사는 아니다.

 

 그러나 행복론에서 특히 피하라는 것 가운데 거역하면서 살고 싶은 딱 하나가 있다.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거위의 꿈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꿈도 아니라 하여도. 다만 집착을 해본 적도 없지만 그것은 벗고 싶다. 논어에서도 '집착을 버리니 仁이 다가오더라'고 했던가. 바다는 광활하여 고기가 뛰어 노는대로 버려두고 하늘은 막힘없는 그 허공에 새가 나는대로 내버려 둘 일이다. 솔로몬이 말했듯 최영미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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