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뒤주/ 허정분 느티나무 뒤주/ 허정분 어른들 손때가 묻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던 쌀뒤주를 육촌 형님이 우리 집 아궁이 땔감용으로 주셨다 뿌옇게 먼지 쓴 하 세월의 부질없음이 겹겹이 쌓인 몸피 쌀 두 가마쯤은 너끈히 품었을 텅 빈 뒤주 안 얼룩진 창호 벽을 노린재 두 마리 유영중이다 시숙님 어..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봄맞이꽃/ 김윤현 봄맞이꽃/ 김윤현 추운 겨울이 있어 꽃은 더 아름답게 피고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세상은 또 별처럼 반짝거릴 것이라며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흰 눈 속으로/ 강은교 흰 눈 속으로/ 강은교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맞..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 평생 변함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가 되어 나에게 변함없..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부패의 힘/ 나희덕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바람꽃/ 전여운 바람꽃/ 전여운 시장 통을 흔들던 기차의 굉음 저 멀리 떠나가면 낮보다 환한 쇼윈도 불빛 뒷골목을 차지하고 구경꾼들 소리도 없는 걸음으로 모인다 눈물도 말라버린 핏기 잃은 얼굴 불완전한 존재에서 풍겨오는 분 냄새 바람에 쫓겨 온 꽃, 파르르 떨고 있는 여린 잎사귀 말초신경만 곧..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사람의 일/ 천양희 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첫 봄나물/ 고재종 첫 봄나물/ 고재종 얼어붙었던 흙이 풀리는 이월 중순 양지바른 비탈언덕에 눈뜨는 생명 있다 아직도 메마른 잔디 사이로 하얀색 조그만 꽃을 피운 냉이와 다닥다닥 노란색 꽃을 피운 꽃다지와 자주색 동그란 꽃을 층층이 매단 광대나물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 저 작은 것..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대박이란 말/ 권순진 대박이란 말/ 권순진 툭, 걷어차이는 것들마다 대박이다 음식이 조금만 맛나도 대박 약간 이상한 옷을 입고 나와도 대박 복면가왕에서 입을 달싹이기만 해도 대박 텔레비전 자막마다 대박 아이어른 가릴 것 없이 온통 대박이다 상황과는 무관하게 이리저리 잘도 갖다 붙인다 한 나라의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