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부패의 힘/ 나희덕

모든 2 2018. 4. 13. 22:49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시집「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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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어질 것들이 썩지 않고, 사라질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성욕 왕성한 아메바들이 와글거리는, 무성번식으로 미라가 들끓는 무시무시한 세상. 산성비를 맞으면 처마의 함석은 당연히 더 빠른 속도로 부식되어야 하고, 구멍이 뚫리고 바스러져야한다. '스테인레스'의 견고한 천박함이라니, 또 불멸이란 얼마나 날선 오만인가.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며,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실로 부패는 신의 섭리이자 대자연의 순환법칙이며, 생사의 묘행이 그것에 다 농축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조용히 낡아감인데, 시간을 걸어 잠귀는 방부제란 얼마나 끔찍한가. 시간이 존재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때, 모든 사물은 제 윤곽을 허무는 게 마땅하다. 시간은 결코 그 속도를 늦춰주는 법이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럼에도 제대로 썩지도 녹슬지도 못한 채 방부제를 섭생하며 조바심으로 허공 속을 발버둥 쳐댄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인데, 우리들은 내 안의 부패에 대한 공포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형상의 낡아짐을 더 두려워한다. 겉만 멀쩡한 척 살아간다.


  ‘아지노모도의 들쩍지근한 맛내기에 이미 길들여졌고, 물기를 쥐어짜내려고 절대 먹지 말라는 실리카겔(방습제)’과도 오랜 동거를 해왔다. 부정은 부정을 감시하지 않고, 부패는 부패를 반성하지 않는 세상에서 영원불멸하지 않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우리를 안심시킨다. ‘이 썩을 놈, 이 썩을 놈의 세상은 욕도 아닌 것이다. 잘 못되어가고 있고 부패해 있음을 빤히 아는데도 애써 외면하고 아닌 것 마냥 비닐 한 장 슬쩍 덮고서 넘어가려한다면 그 낭패와 피로는 누가 감당하고 견뎌야하나.


  지금의 미투 캠페인은 누대에 걸쳐 썩지 않은 채 굳건하게 버텨온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적 지배의식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다. 누군가 나서서 외치지 않았으면 여전히 그것은 관행이고 속은 썩어문드러질지언정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였을 것이다. 지금껏 드러난 사례를 보면 성폭력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은 우리사회 전반에 만연한 구조적인 문제임이 확실하다. 야당 일각에서는 진보진영의 이중성을 지적하지만, 보수진영의 둘레에서는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이 먹혀들거나 상대적으로 피해자 측 고발의식이 취약해서 그리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굴 손가락질 하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너의 음흉한 속내는 무언가. 자기 이익을 위해 배신과 음해를 서슴지 않는 너의 역겨운 행위를 마냥 오냐 오냐 받아줘도 될 일인가. 범퍼에 살짝 키스한 것 갖고 목덜미 움켜쥐며 자빠지는 너의 허리우드액션은 다 무엇이냐. 부패를 부패라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보다 더한 부패는 없다. 다만 낡음'부패'를 실용과 효용의 소멸로만 보지 않고, 또 다른 가치로의 이행으로 볼 때 기꺼이 시간 앞에 무릎을 꿇어도 좋으리라. 그 인식이 통할 때 위아래로 만연한 부패의 복마전은 종식되리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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