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전여운
시장 통을 흔들던 기차의 굉음 저 멀리 떠나가면
낮보다 환한 쇼윈도 불빛
뒷골목을 차지하고
구경꾼들 소리도 없는 걸음으로 모인다
눈물도 말라버린 핏기 잃은 얼굴
불완전한 존재에서 풍겨오는 분 냄새
바람에 쫓겨 온 꽃,
파르르 떨고 있는 여린 잎사귀
말초신경만 곧추세우고
시작도 묻지 않는 여기엔
인간도 가끔 개처럼 웅웅거리며
암흑 같은 시간 속을 질주한다
낮게 깔리는 휘파람 소리는
도무지 의미를 읽을 수 없는 몸짓
흔들리는 커튼 뒤로 버려진 콘돔은
무감각한 절망의 순간
꿈마저 허기진
바람꽃,
바람 따라
마 ․ 른 ․ 울 ․ 음 ․ 운 ․ 다
- 시집『밥 그리고 침대』(학이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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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바람의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아네모네를 바람꽃이라는 별칭으로 따로 불렀다. 이 시에서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 관찰자의 시선이 기찻길 옆 어느 유곽에 향해있으며 ‘바람꽃’은 그곳의 성매매여성이 아닐까 짐작케 한다. 대구에는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일제 강점기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신사를 세운 뒤, 거기서 나온 돌로 습지였던 지금의 도원동 일대를 메워 1907년 성매매업소 집결지를 조성하였다. 그 자갈마당은 1916년 일본의 공창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해에 유곽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후 100년 넘도록 이어져 지금도 이 일대의 성매매업소 30여 곳이 영업 중이며 백여 명의 종사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집결지는 전국적으로 20여 곳에 이르며 대체로 철도역과 항구 등의 주변에 분포하면서 일제강점기에서부터 비롯된 잔재라 할 수 있다. 당시 성 매매 허용 연령은 16세 이상이었고 유곽의 여성들은 외출 외박이 불가능했다. 업주에 의한 여성 종사자의 ‘암흑 같은 시간’은 당시에도 존재했다. 1929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창기 6명이 포주에 의해 학대와 착취를 당해 집단 파업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갈마당이 지금과 같은 유리방 형태가 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6년 이후였다. 당시 자갈마당뿐 아니라 부산 완월동, 인천 옐로하우스, 서울 미아리 등 각 지역의 집장촌은 환경개선작업을 실시한다. 좁은 길 대신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뚫리고 넓은 유리창안에 여성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유리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한때 청량리 588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 높았다. 여성들에게 처음엔 한복을 입혔다가 나중엔 웨딩드레스 비슷한 의상으로 변신하였으나 성매매특별법이 가동된 이후 복장이 자유로워졌다. 지금은 윤락가 정비사업으로 집장촌은 은밀하게 대형화되고, 유리방으로 정비하지 못한 소규모 업소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자갈마당’도 성매매특별법의 주요 단속대상이 되어 갈수록 위축되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규모가 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엔 시청 앞에서 여성 종사자들의 성노동권 존중과 생존권 보장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마스크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를 접했다. 당사자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는 이유이다. 최근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지자체의 도시환경정비 문화 프로젝트까지 가동되어 그들로서도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일반 여성들로서는 이런 ‘추잡한’ 사창가를 남자들이 왜 찾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 동기와 ‘고객’의 층위는 실로 버라이어티하다.
6~70년대엔 군에 입대할 때까지 ‘딱지’를 떼지 못했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의례를 치루는 것이 관례였고, 결혼식을 앞두고 흥청망청 망가지는 ‘댕기풀이’의 방점을 이곳에서 찍기도 하였다. 육교에 엎드려 구걸한 깡통 속 동전을 긁어모아 찾아오는 걸인에서부터 순정파 대학생, 신분을 감춘 지체 높은 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공광규의 시 ‘걸림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이곳을 찾는 멀쩡한 사람도 있다. 가끔 연예인들이 안마시술소를 찾는 경우도 같은 이유다. 수컷의 너저분한 본능과 성의 수요와 공급.
소재의 특성상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시인은 그들의 ‘마른 울음’에도 따스한 연민을 보내고 있다. 물론 성매매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할 의도가 개입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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