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속으로/ 강은교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맞춰야 하네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맞추듯이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눈길 하나가 눈길 둘과 입맞추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 시집『벽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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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도 오늘 오전 대설주의보가 발령되었다. 대구에서 이처럼 눈다운 눈이 오기로는 지난겨울은 물론이고 과거 몇 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기습적인 폭설로 도시철도 3호선 지상철도 멈춰 섰다. 2015년 개통 이래 3호선 지상철의 운행이 중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지하철 1,2호선을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이 사실상 마비되었고, 도시기능 전체가 멈춰버렸다. 이 틈바구니에서 푸짐하게 내린 눈을 창밖으로만 완상하지 못하고 기어이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도 내 안에 동심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나 보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안기고 또 껴안았다. 공원 한가운데 잔디광장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삼삼오오 함께 어울려 눈을 굴리고 뭉쳐서 던지며 놀고 있다. 초등 2학년 쯤 되 보이는 사내아이 둘은 마치 영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동작으로 벌렁 눈 위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쫙 뻗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안녕하세요?”하고 크게 소리친다. 그동안 저 중원 땅에만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던’ 것들이 오늘은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 맞추듯이’ 다녀갔다. 마음껏 팔 벌려 껴안아도 좋을 만큼 충분히 왔다.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였다.
길과 길의 문턱을 허물며 경계를 조금씩 부셔버렸다. 지워진 경계 사이로 자전거 하나 넘어간다. 빨간 마티즈 하나가 부릉부릉 꽁무니로 흰 연기를 잠시 내뿜었으나 그냥 주저앉는다. 줄 풀린 강아지는 꼬랑지를 흔들며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반쯤 얼어붙은 강줄기 따라 왜가리 한 마리 낮은 수평으로 날아가니 어느새 강변은 하얗게 꿈꾸는 겨울강가다. 때맞추어 가슴에 묻어둔 30년 전 눈 그림자 하나 꺼내어 천천히 인화한다. 얼른 카메라를 찾아내 셔터를 누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역시 나는 그게 문제다. 하지만 내가 일으킨 길 아닌데 ‘흰 눈 속으로’ 내가 칭칭 감겼다.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저렇듯 하얗게 세상을 덮어버리듯 한 번씩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순수한 동심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우리는 언제부터 욕을 배우고 거짓말을 시작하고 내 안에서 주체 못할 탐욕과 욕정의 치어를 방생시키면서 부정한 것들이 자라나도록 했을까.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고 질투하고 상처를 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을까. 꼭 하느님의 죄 사함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저 V자를 그리는 동심의 원형으로 순백의 원단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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