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모든 2 2018. 4. 13. 22:52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 시집『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 갈수 있다면』(세계사, 1998)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란 지극히 감상적이어서 불변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사랑의 변화는 권태나 사랑의 냉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거나 원리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은 지켜내야 마땅한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숭고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학습 받아 왔으므로. 그래야 미덕이니까.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선량한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결정한 사랑에 의심이 생기고 자주 주춤거린다면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판단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사랑이 변하고 있음에도 못 본 척 알지 못한 척 마음속에 바윗돌 하나 달아매기도 한다. 그래서 굳건한 운명적 사랑이라 치부하고 인내하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이 땅의 수많은 부부들이 있다.

 


 개별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우 건강한 사랑법이다. 그러나 부부가 아닌 정상적인 계약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의 사랑이란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둘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혼선과 복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진정성, 다각 구도, 권태와 질투의 비상구, 이기심의 공통분모, 다른 이의 시선, 조바심, 도덕률 따위의 개연성이 늘 전제되어 위태로우며 까발려지는 것이 사랑의 현주소이고 우듬지다.

 


 사람은 때로 사소한 우연에 의한 만남을 운명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불가항력이라며 시간에 그 사랑을 맡겨버린다. 장석주 시인은 그의 다른 시 '엽서 2'에서 그 사랑이 내 의지와 힘보다는 더 큰 어떤 것이라며 운명 같은 사랑을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때없이 스쳐가는 바람의 유혹에 빠졌다고, 날 저물고 어둔 하늘 초록별의 손짓에 따랐다고, 그 길을 에워싼 숲의 깊은 고요에 매혹당했다고 수군거리지만, 사랑은 결코 죄가 아니지요' 라고

 


 내게도 그런 운명 같은 불가항력의 사랑이 있을까. 지금까지는 '푹새'로 치고, 그 사랑을 삶 속에서 단 한번 이루어낼 수 있을까. 씹고 또 씹어도 내 입술에 부딪치는 이름은 오직 하나뿐인 그런 사랑. 교과서 다 불사르고 그 이름 삼키면 사막의 생명수처럼 달디 단. 만약 그런 사랑이 있다면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있는가도, 어떤 도덕률도, 눈치코치도...그래서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고 할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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