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꽃/ 김윤현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세상은 또 별처럼 반짝거릴 것이라며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화사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고독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며
풍부한 삶을 바라기보다
풍요를 누리는 봄맞이꽃처럼 살고 싶다
- 시집『들꽃을 엿듣다』(시와 에세이,2007)
들꽃은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산과 들에서 자연 상태로 자라는 꽃을 일컫는다. 봄맞이꽃도 봄이면 어디에서건 볼 수 있는 들꽃이다. 하지만 이름에 걸맞게 봄을 선도하며 피는 꽃이 아니라 4월 초순경이나 되어야 논두렁 밭두렁에서 하얗게 핀다. 봄부터 시작해서 한겨울까지 우리나라에서 피고 지는 들꽃만도 4천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들꽃은 일반 꽃집에서 볼 수 있는 꽃 마냥 화려하진 않지만 저마다의 아름다운 개성으로 빛깔과 향기의 소박함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볼수록 정이 들어 요즘엔 디지털카메라의 대중화 추세에 따라 야생화 탐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고 야생화 공부 모임도 흔하게 본다.
오랜 기간 우리 땅의 들꽃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들과의 은밀한 내통기록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걸 보면 김윤현은 말하나마나 들꽃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시인이다. 시집 목차에 있는 예슨 여섯 종의 들꽃 하나하나는 우리의 산하에서 이름 없이 낮고 질기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민초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민중적 서정시로 읽혀진다. 저 많은 들꽃의 언어를 김윤현 시인만큼 제대로 무릎을 구부리고 엎드려서 엿들었던 시인이 과연 또 있을까. 시 한 편에 꽃 한 송이마다 오롯이 눈과 가슴에서 다시 피고 또 지며 꽃의 언어를 듣는 들꽃의 향연은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참으로 경이롭고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꽃을 비롯한 식물 이름을 들을 때는 끄덕끄덕해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곤 한다. 수십 번을 반복 학습해야 겨우 새겨지는 이름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사람이거나 자신과 특별한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은 모두 무명인이 된다. 시인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시인은 ‘무명시인’이고 ‘이름 모를 꽃’처럼 ‘이름 없는 시인’이 되고 만다.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불러주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기에 ‘별 볼일 없는 시인’이 될 뿐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를 인식하고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는 나 같은 사람과는 달리 김윤현 시인은 ‘이름 모를 들꽃’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될 분이다.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도종환, 배창환, 김용락, 정대호 시인 등과 함께 1984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지난 해 펴낸 『발에 차이는 돌도 경전이다』(푸른사상) 등 6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다. 2017년 ‘대구시협상’을 수상하고 매일신춘문예 심사도 맡았다. 작년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 더 분주하게 보내고 있는 시인은 나와 비슷한 연배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경전처럼 떠받들고 싶은 시인이다. 세상엔 들꽃의 수만큼이나 많은 시인들이 있다.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놓는 시인도 있다. 하지만 김윤현은 나지막하게 꽃을 피워 둘레를 향기롭게 하고 스스로 풍요로운 시인이다.
그런 가운데 문득 ‘나로 인해 누군가 봄을 화사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같은 사람으로 선하게 변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채송화’를 빌려 말하는 시인의 진술은 고스란히 시인의 시와 삶에 대한 태도임을 알 수 있다. 들꽃의 개화가 철을 맞았다. 들꽃을 통해 한결 더 진한 감동으로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끼길 원한다면 덮어놓고 카메라의 셔터만 눌러댈 게 아니라 넌지시 시인의 호흡을 따라 ‘들꽃을 엿듣는’ 것은 어떨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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