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봄비/ 고정희

모든 2 2018. 4. 13. 22:55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시집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


 

 ‘우순풍조 민안락(雨順風調 民安樂)’이란 말이 있다. 비가 순조롭게 내리고 바람이 조화롭게 불면 백성이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비 가운데서도 봄비는 생명이고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봄비는 쌀비라는 말도 있다. 풍년농사를 예고하는 단비라는 의미다. 봄비로 말미암아 가문 대지의 숨결이 살아나고, 이 땅에 살아가는 뭇 생명의 생기도 살아날 것이다. 오늘 내리는 봄비가 땅의 기운을 쪼아 숨통을 틔워 낼 것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초목뿐 아니라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도 이 봄비에 설렌다. 가슴을 쭉 펴고 비를 맞으며 걷고, 격조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며, 잉크가 말라가는 볼펜으로 뭔가 끼적이기도 한다.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실크의 촉감으로 온몸을 안마하듯 조곤조곤 밟고 지나가는 봄비는 이뻐라. 이럴 때 자기도 모르게 빗장 건 마음이 열려 탄성을 자아내며 봄을 찬양한다. 그리고 선명한 음색의 봄비는 모든 것을 씻겨주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해준다. 봄비와 함께 떨리는 소식이 자분자분 걸어오고 있어 머지않아 좋은 일로 당도하리라 믿는다. 파랑새 한 마리 월계수 잎을 물고 저 봄비 속으로 넘실거리며 오고 있다. 고운이나 미운 이에게나 풀이나 나무나, 산이나 강이나 철조망이나 초원이나 두루 넘실대며 희망의 전령사로 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사로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확정됐다. 장관급 인사 두 명이 동시에 대북특사로 파견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정확한 의중을 파악하고 의미 있는 북미대화에 응하도록 설득해내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사단은 이번 주 방북할 예정이며,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정 실장은 평양을 다녀오는 대로 워싱턴을 방문해 방북 결과를 직접 설명하고 향후 대북공조 방향을 조율할 것으로 예상된다. 잘 되어야 될 텐 데가 아니라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너는 오리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봄을 마중 나가자. 그득한 봄볕과 촉촉한 봄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포옹하자.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