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지혜, 2012)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를 나도 보았다. 민들레와 괭이밥도 보았다. 어쩌다 대구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 쯤 나도 보았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 또한 내가 늘 보는 풍경 목록 가운데 하나다. 약간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 역시 한때 내 일상의 단란한 배경이었다. 그리고 더 있다. 걸음 힘겨운 할머니가 끄는 마분지 박스 서너 장 실린 유모차가 나를 멈추게 했다. “아저씨, 삼성카드 없으시면 하나 하세요!” 아줌마의 판매 촉진 활동이 길 가던 나를 불쑥 멈추게도 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주인공 부부가 태극기 하강 시간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싸움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과 같이 아주 오랜 일이지만 나도 따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현충일 추념시간에 가던 길을 멈추고 묵념을 한 기억도 있다. 텔레비전에서 삼일절 기념식 중계방송을 보면서도 선국순열에 대한 묵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식 웃는 아이들에게 따라 하라고 가르친 기억은 없다. 삼일절엔 일찌감치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가끔 난다. 아버지는 1919 기미년 생이고 말하자면 올해가 탄신 99주년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이 한 분 더 있다.
노무현 대통령으로, 그분이 취임 직후 2003년 3.1절 기념식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고 한 연설 때문이다. 그가 부엉이바위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발길을 떠올릴 때면 문득문득 나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내란음모협의로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6년 뒤 사면 석방되었지만 그는 지금 또 다시 영혼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를 비호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 순간의 꽃이, 60년 문학인생이 송두리째 꺾였다고 해도 전적으로 그분의 책임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엔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채, 그들의 기회주의와 가짜 애국이 판을 치고 있는 마당에서의 ‘적폐 청산’이라면 좀 억울한 노릇이 아닌가. 무엇이 더 중하고 덜 중하고는 없겠으나 선과 후는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내 시집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야기들도 길에서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고 그들에 대한 연민이다.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한창 손님을 받아야할 시간에 텅 빈 식당에서 밖을 서성이는 주인여자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도 그렇다. 서정적 풍경 앞에 걸음을 멈추기보다 측은지심이 발동할 경우가 많다. 세상의 뒷모습을 응시할 만큼 시력은 좋지 않으나 측은한 광경을 보면 공연히 슬프고 가슴이 무겁다. 요즘 고은 시인을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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