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순진시/ 이정록

모든 2 2018. 4. 13. 23:00



순진시/ 이정록
     


이웃집 아저씨는
농사 지으며 떡방앗간을 한다.
소 키우고 쇠전에서 중개인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 방앗간 떡이,
내가 키운 소가 최고라고 한다.

후배 중에 축협 도축부에서
소와 돼지를 해체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소고기전문식당도 한다.
가장 맛있는 부위만 들여오기에
자기네 식당이 최고의 맛집이라고 한다.

권순진이라고
황소 같고 떡방앗간 같은 시인이 있다.
글도 소처럼 듬직하고,
까치설날 떡방앗간처럼 뜨겁다.

그의 시는 생김새와 똑같지만
여물처럼 되새김질하다 보면
가슴 속 무쇠솥에서 꽃구름이 핀다.
게다가 남의 시를 풀어서,
씻고 빻고 쪄서 시루떡으로 노놔준다.

절대로 자기 시만 맛있다고,
꽃등심이라고 자랑하지 않는다.
고삐를 제 뿔에 묶고
묵묵히 묵정밭을 쟁기질한다.

일소와 떡방앗간이 쓰는 시를
순진시라고 부른다.


권순진 시집 [낙타는 뛰지 않는다] 출간을 기념하며


 

  지난 주말 오후 학이사 2층 도서관에서 졸시집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시집의 표사를 써준 이정록 시인이 천안에서 대구로 오는 열차 안에서 이날의 축사를 끼적이다가 시 비스무리해지다가 별난실명시가 하나 탄생되었던 것이다. 물론 시인이 쓴 시임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목적시는 일급시인들에겐 대개 일회용으로 기능하고 만다. 장차 따로 어디에 발표되거나 시집에 묶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그러니 실명의 당사자로서는 더구나 나 같은 등외품 시인으로서는 이 횡재가 아깝지 않을 수 없다. 이정록 시인도 출간기념회장에서 낭독 후 프린트 한 것을 내게 건네면서 요긴하게 써먹으라고 했으니 쑥스럽지만 소개하는 것이다.


  이정록 시인은 비좁은 열차 안에서 덩치 큰 옆 사람과 삐대어가면서 시가 탄생된 비화를 디테일한 액션을 섞어가며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이정록 시인과 편한 자리를 한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이라면 다들 느끼겠지만 그의 맹렬한 입담과 재담, 그의 노래와 개그에 탄복한다. 그러니까 그는 시인 중에는 드물게 쇼쇼쇼가 되는 사람이다. 실제로 왕년에 개그맨 지망생이기도 했다. 충남 홍성 출신인 시인은 개그맨 시험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붙었더라면 최양락과 동기가 될 뻔했다. 소설가 한창훈은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유랑극단 변사를 했을 것이라면서, 그 입담은 구라로 유명한 황석영 선생이 고개 저으며 너한테는 졌다고 할 정도란다.


  그 재능이 시로 옮겨 붙어 발화하고 만개도 했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이정록은 사람과 사물을 맑고 투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기에 동시를 쓸 수 있으며 아동문학 쪽에서도 추앙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으리라. <어머니학교> <아버지학교> 연작시도 그 에너지가 발휘된 작품들이다. 그는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고 온몸으로 줍는 거라고 했다. 삶의 무게를 슬며시 밀어 올리는 저 능청과 해학 가운데 알싸한 비감이 걸러지고, 또 이상하게 그것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를 얻는다. 그는 이번에도 문인수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좋았다. 마음이 문풍지처럼 서럽고, 동짓달 간장독의 귀때기처럼 시렸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게는 립 서비스가 가동된 듯하고 후한 인물평을 해준 듯하지만 가만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이성복 시인이 전화를 주셔서 한참동안 조언을 해주었다. “남의 시다바리만 하지 말고 자기 글을 쓰면 좋겠다.”는 것이다. ‘남의 시를 풀어서, 씻고 빻고 쪄서 시루떡으로 나눠주기만 할 게 아니라 시든 산문이든 독자적인 글쓰기에 매진하면 훨씬 성취의 덩어리가 클 것이란 조언이다. 부끄러운 시집을 내고서 잠시 고민을 했다. 작은아이가 설날 집에 와서 시집을 주었더니 몇쪽 읽어보고선 대뜸 하는 말이 시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거예요?”그런다. 가장 솔직하고 직설적인 비평을 뭣 모르는 아들 녀석에게 들었다.


  그러면서 시집을 두 권만 더 달란다. 누군가 줄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순간 기분이 괜찮아졌다. 갈 때 책값이라며 용돈 외에 봉투 하나를 더 내미는데 20만 원이 들었다. 평소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녀석이라 마땅치 않게 여겼는데 이런 호사를 누릴 줄은 몰랐다. 이번 출간기념회에는 가족도 별로 없고 친구도 많지 않지만 개별적인 친지와 친구들에게는 따로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와 격려를 해주시고 불가피하게 참석은 못했지만 더 많은 분들께서 축하와 응원의 말씀을 퍼부어주셨다. ‘절대로 자기 시만 맛있다고, 꽃등심이라고 자랑하지 않으나 자축 세리모니를 길게 이어가면 눈총을 받을 것이다.


  비록 남의 시만 소개하다가 모처럼의 호사일지라도. 그러니까 이것으로 종을 치겠다. 역시 내게는 묵묵히 묵정밭을 쟁기질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지난 며칠간 계량 못할 빚을 진 기분이었으나 행복했다. 그 기운 오래 받아 가던 길 열심히 가면서 틈틈이 내 떡방앗간도 돌릴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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