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월 / 문인수

모든 2 2018. 4. 13. 22:59



2월 /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 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어찌어찌 동동거리다보니 2월도 다 갔고 모레는 정월대보름이다. 지푸라기와 잔가지 따위, 태워서 탈 것들은 죄다 끌어 모아 불을 붙였다. 후후 입김을 불어 불붙은 불티들을 못으로 구멍 낸 깡통에다 쑤셔 넣었다. 얼굴도 쥐불도 벌겋게 달아오르면 깡통을 빙빙 돌려 달에 맞섰고 쟁반 같은 달을 그을렸다. 55년 전쯤 그날의 잔영이다. 이 무렵의 날씨는 통 종잡을 수 없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찬 기운이 대기를 지배하는가 하면 어느 해엔 재해 수준의 폭설이 몰아치다가도, 어느새 서려있는 완연한 봄기운이 흡입되기도 한다. 한편의 양지 바른 곳에서는 노루귀며 봄까치꽃, 개불알풀 등의 야생화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봄을 기다리며 야금야금 하루씩 갉아먹는 동안 아는 사람 가운데 몇은 가족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냈고 또 몇은 새 생명을 얻었으며, 어떤 이는 2년 전 이맘때 내 어머니가 그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디쯤 계신다. 나는 얼떨결에 시집이란 걸 내고 이를 기념하는 자리도 가졌다. 이제 다시 <시와시와> 봄호를 준비해야하고, 올해는 잘 될지 모르겠으나 <맛있게 읽은 시> 두 권도 펴낼 계획이어서 다시 또 빠듯한 일상을 보내야할 것 같다. 2월이 무슨 공존과 경계의 계절인 듯 요즘 들어 부쩍 삶이란 살다가 죽을 뿐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공연히 남을 무시하거나 본의 아니라 하더라도 남을 해코지하는 일만은 말아야겠다.


어쩌면 그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석가는 왕자의 자리를 헌 신짝처럼 버리셨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2월에도 어디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에 당도하여 저렇듯 격의 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을 노래하고 있다. 2월의 저녁답 풍경은 다른 달에 비해 조금 다른 느낌이었을까? 달력 시로 알려진 오세영 시인의 2월이란 시에는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양력으로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1/6이 흘러갔다. ‘벌써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게 한다.


시인은 시가 마구 방언처럼 터져 나올 무렵 어디로건 분답하게 떠돌아다녔고 특히 동강에 푹 빠졌다. 동강만이 아니라 국내 곡곡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랑하며 천의무봉 타개지듯배설한 시들로 가득한 시집이 <동강의 높은 새>. 인디언들은 2월을 홀로 걷는 달이라며 삼나무에 꽃바람 불고, 강에 얼음이 풀리는 달이라고 했다. ‘먹을 것이 없어 뼈를 갉작거리는 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움이 트고 햇빛에 서리 반짝이는 달을 보며 ,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렇게 2월도 다 가버렸지만 이제부터야말로 그대를 찬양하며 수그린 몸 다시 곧추세워도 좋지 않은가. 그대여, 봄비가 온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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