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 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어찌어찌 동동거리다보니 2월도 다 갔고 모레는 정월대보름이다. 지푸라기와 잔가지 따위, 태워서 탈 것들은 죄다 끌어 모아 불을 붙였다. 후후 입김을 불어 불붙은 불티들을 못으로 구멍 낸 깡통에다 쑤셔 넣었다. 얼굴도 쥐불도 벌겋게 달아오르면 깡통을 빙빙 돌려 달에 맞섰고 쟁반 같은 달을 그을렸다. 55년 전쯤 그날의 잔영이다. 이 무렵의 날씨는 통 종잡을 수 없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찬 기운이 대기를 지배하는가 하면 어느 해엔 재해 수준의 폭설이 몰아치다가도, 어느새 서려있는 완연한 봄기운이 흡입되기도 한다. 한편의 양지 바른 곳에서는 노루귀며 봄까치꽃, 개불알풀 등의 야생화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봄을 기다리며 야금야금 하루씩 갉아먹는 동안 아는 사람 가운데 몇은 가족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냈고 또 몇은 새 생명을 얻었으며, 어떤 이는 2년 전 이맘때 내 어머니가 그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디쯤 계신다. 나는 얼떨결에 시집이란 걸 내고 이를 기념하는 자리도 가졌다. 이제 다시 <시와시와> 봄호를 준비해야하고, 올해는 잘 될지 모르겠으나 <맛있게 읽은 시> 두 권도 펴낼 계획이어서 다시 또 빠듯한 일상을 보내야할 것 같다. 2월이 무슨 공존과 경계의 계절인 듯 요즘 들어 부쩍 삶이란 ‘살다가 죽을 뿐’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공연히 남을 무시하거나 본의 아니라 하더라도 남을 해코지하는 일만은 말아야겠다.
어쩌면 그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석가는 왕자의 자리를 헌 신짝처럼 버리셨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2월에도 어디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에 당도하여 ‘저렇듯 격의 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을 노래하고 있다. 2월의 저녁답 풍경은 다른 달에 비해 조금 다른 느낌이었을까? 달력 시로 알려진 오세영 시인의 2월이란 시에는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양력으로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1/6이 흘러갔다. ‘벌써’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게 한다.
시인은 시가 마구 방언처럼 터져 나올 무렵 어디로건 분답하게 떠돌아다녔고 특히 동강에 푹 빠졌다. 동강만이 아니라 국내 곡곡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랑하며 천의무봉 ‘타개지듯’ 배설한 시들로 가득한 시집이 <동강의 높은 새>다. 인디언들은 2월을 ‘홀로 걷는 달’이라며 ‘삼나무에 꽃바람 불고, 강에 얼음이 풀리는 달’이라고 했다. ‘먹을 것이 없어 뼈를 갉작거리는 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움이 트고 햇빛에 서리 반짝이는 달’을 보며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렇게 2월도 다 가버렸지만 이제부터야말로 ’그대‘를 찬양하며 수그린 몸 다시 곧추세워도 좋지 않은가. 그대여, 봄비가 온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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