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수리/ 권순진
내 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오밤중 담 너머로 쌀가마니 세 개를 넘기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부터다 불의에 수발을 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다 그 일을 보조하기 위해 방위 둘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후방 헌병대였고 쌀은 남아돌았다 수감자들에겐 정량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헌병들은 외식문화에 익숙해져있었다 다음날 워커발로 조인트를 여러 차례 까였다 남들은 일 년에 한번 갈까 말까한 유격훈련을 고참병 대신 두 번이나 더 다녀왔다 차라리 유격장이 신간은 더 편하긴 했다 동료 사병들도 내가 포크 창에 찍힌 노란 단무지 같은 신세인 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비겁 위에 물구나무 선 연민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찍힌 건 나 말고도 더 있다 소원수리 때 ‘황소무사통과탕’에 관한 진실을 까발렸다가 필적감정으로 들통 난 K상병이다 나도 종이 앞에서 딸막딸막한 적은 있으나 다른 병사처럼 ‘현재 생활 만족’ ‘불만사항 제로’였다 제대를 하고난 이후에도 늘 그런 식이다 어디 시원하게 답답함을 풀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이미 대책이 서지 않는 생이다
- 시집 『낙타는 뛰지 않는다』 (학이사, 2018)
70년대 중반 군복무 당시 이야기다. 그 시절엔 어디서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리와 불의가 저질러지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비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끗발’이라 칭했다. 내가 근무한 부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명색이 군 경찰사법기관임에도 돈이 좀 된다 싶은 것에는 무엇이든 껄떡거렸다. 남아도는 쌀을 월장시켜 민간에게 팔아치우는 행위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선임하사의 단독범행은 아니었다. 조인트를 까인 것도 실은 근무과장인 모 대위로부터다. 다만 헌병대장인 중령도 그 사실을 알고 개입했거나 묵인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대에서 처음 받은 보직은 수사과 수사관의 보조 사병이었다. 부정을 저질러 구속된 장교에게 EE8 야전전화기의 전류를 이용해 고문을 가하는 지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근무과에서 1종을 보던 선배의 꼬드김과 배려로 그의 조수가 될 수 있었다. 자주 밥도 얻어먹고 청자 담배도 얻어 피웠다.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지만 그가 말년 휴가를 간 사이에 드디어 내가 그 일을 직접 떠맡은 것이다. 결국 일을 사달 내는 바람에 나는 또 적성 부적합으로 5종 탄약 병기계로 보직변경이 되었다.
병기계는 부대 내의 모든 총기와 탄약, 그리고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돈 되는 일이 아니어서 윗선의 관심과 총애를 받을 일은 없었으나 사실 군대에서 가장 책임이 무겁고 중요한 일이기는 했다. 가끔씩 수사관들이 이상한 총기 부품이나 탄약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M16 한 정은 어렵지 않게 조립할 수 있을 정도였고, 무등록 권총을 맡기고서 잊어먹고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간 수사관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제와도 호환되는 무전기 배터리 BA30등을 얻어가려고 손을 내미는 상관도 있었다.
내게 조인트를 깐 근무과장이 당직사령 때 권총을 불출해가고서 반납하지 않았는데 한사코 자기는 반납했다고 우기는 개떡 같은 일이 발생했다. 자칫 총기분실혐의를 뒤집어쓸 판이었는데 내가 책상 서랍을 다시 잘 살펴봐주시라고 했더니 ‘너 안 나오면 뒤졌어’라는 협박을 듣고서야 책상의 서류 밑에 있던 권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대위가 한번은 무슨 이야기 끝에 “우리 헌병 병과는 전시에 더 끗발을 날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이 한번 터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른 병사들이 동의하듯 히쭉히쭉 웃는 틈새에 나도 따라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육군 장교께서 전쟁을 바란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했더니 군기가 빠졌다며 전에 까인 것보다 훨씬 세게 더 많은 횟수의 조인트를 까였다. 당시엔 구타가 횡횡하던 시절이라 참는 것 말고 달리 대처할 방도는 없었다. 정말 겁대가리 없거나 간뎅이가 좀 컸다면 병기고에서 총알이 장전된 총을 하나 가져나왔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지 않아도 착착 망가져가는 인생인데. 요즘에도 문득문득 그 대위가 생각나는데 북에서 사람 하나 내려오는 걸 갖고 당리당략만을 생각하고서 길길이 날뛰며 재를 뿌려대는 정치인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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