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수염/ 장인수

모든 2 2018. 4. 13. 23:03



수염/ 장인수

 

새벽 5, 거울을 보니 밤새 수염이 웃자랐다.

이놈 수염,

남성 호르몬을 남발하는 이놈의 자슥

내 얼굴에 쳐들어 와서 피부를 야곰야곰 묵정밭으로 만드는 녀석!

때론 안면몰수의 그런 너의 성품이 좋아서

내 턱과 입술 주위에 야생화를 피우겠지 싶어 몇 주 넘게 묵힌 적도 있겄만 수염은 볼품없는

잡초에 불과했더라.

촌놈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묻어있는 도시적 겉치레와 품격을 제거하기 위

해 일부러 수염을 깎지 않은 적도 있었다.

관우 장비의 수염 흉내를 내고

이황이나 이이 선생의 수염을 내심 바랬다.

이래도 저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수염아,

차라리 너는 개털처럼 자라기도 하거라.

나의 게으름을 맘껏 갉아먹고 천박하게 얼굴을 도배하고 꼬리를 치라.

수염은

감각령으로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얼굴 밖의 세상으로 쭉쭉 뻗어가서

독자적으로 운동하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내 몸뚱이를 숙주삼아

마구 파먹어라.

때로는 포도 넝쿨로 뻗어가서

나의 얼굴에 신사임당의 포도도(葡萄圖)를 그리고

입술을 악보로 삼아 포도주를 마시고 미친 가객의 헛소리를 부르렴.

수염아,

시커먼 세월의 뿌리야!

너는 내 얼굴에 출몰하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네 멋대로 미치광이의 삶을 살아라.

갈대숲이 되어 새 둥지를 틀다가

수염아,

야크의 털이 되어 천상에 가닿을 차마고도의 험난한 길을

폭설처럼 휘날리거라.

내 얼굴 따위는 짓뭉개버려라.

 

- 계간 시평2011년 가을호



수염은 남성의 기운을 나타내 보이는 전유물이며 남성성의 상징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수염을 힘과 권위, 성적 욕망과 섹시함의 코드로 꼽고 있다. 예로부터 윗입술에 난 수염은 록(祿)이라하고 턱에 난 수염은 관(官)이라 했다. 어떤 일을 오래 겪으면서 쌓여 갖추어진 권위나 위엄을 ‘관록’이라 하는데 그 말은 수염에서 차용되었다. 수염이 긴 자가 문장에 능하다는 말도 있다. 그것은 마치 조금만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아도 ‘문필봉’이라 이름 붙였듯이 늘어뜨린 수염의 형상이 붓을 닮으면 글을 잘 쓸 것이란 막연한 속설이라 하겠다.


관우 장비 뿐 아니라 이순신, 을지문덕 등 수염이 없는 장군을 떠올리기는 어려우며 이황 이이를 비롯하여 옛 선비의 모습에서 수염을 지우는 일은 상상조차 못한다. 삼손의 괴력이 머리카락에 나왔듯 옛날 장군이나 선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힘과 위엄은 그들의 수염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어느새 이 땅에서 수염은 전근대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장군이나 스승, 아버지의 턱에서 수염이 사라졌다. 수염을 잃어버리면서 그들의 위엄까지도 함께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남성들에겐 수염에 대한 환상이 늘 잠재되어 있다. 텁수룩한 수염을 지닌 작가나 감독, 예술인은 왠지 모르게 중후하게 느껴지고 그것은 마치 끊임없는 자아성찰이나 자기고민의 흔적과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뇌하는 예술가의 혼과 맞닿아 있으리란 상상도 하게 된다. 은백색의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무성한 헤밍웨이의 얼굴에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정신 같은 것이 후광처럼 번져 나오기도 했었다. 체 게바라의 수염도 그러했고 함석헌 선생의 희고 긴 수염에서도 고결한 선비의 의기를 느끼지 않았던가.


쿠바의 카스트로 의장은 브라질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면도를 하지 않으면 연간 열흘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그것은 혁명을 구상하는 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귀중한 시간들이라고. 하지만 그는 나중에 미국 언론인 바버라 월터스를 만난 자리에서 수염을 기른 진짜 이유를 ‘질레트면도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자는 매일 아침 위험한 곡예로 면도를 하였다. 21세기 초를 기점으로 면도 문화가 대세가 된 것은 질레트사가 개발 보급한 양날면도기의 역할이 컸다.


저렴하고 안전한 안전면도기 덕분에 서민들도 혼자서 손쉽고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볼품없는 잡초에 불과’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수염을 깎고 싶어도 여전히 귀찮아서 그냥 방치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니까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깎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인데, 나도 2년 전 이맘때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 계신 동안 그랬다. 덥수룩한 모습을 두고 ‘괜찮다’ 느니 ‘계속 기르라’느니 위로의 허언들을 내뱉는 사람도 있지만 열에 일곱은 그럴수록 좀 말끔하게 다니라며 조언했다.


지금도 타고난 게으름 탓에 집에 있으면 며칠씩 면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부러 수염을 기를 의향은 없다. ‘기른다’는 말은 뭔가 공을 들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나는 그럴만한 자질과 소양이 없기 때문이다. 지긋한 중년신사의 콧수염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멋있어하는 여성도 있더라만 그냥 흰머리 하나로 밀고나갈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은 고등학교 선생님들 가운데도 수염을 기른 분들을 둘레에서 자주 보는데 특히 여학생들에게 부러 거칠게 보이려는 의도라 하고 심지어 학교 측에서 권장까지 한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튀는 행위로 터부시해왔으나 근년 들어 한국 남성들의 얼굴에서 수염이 자라고 있다. 비교적 수염이 잘 받는 에릭. 김민준, 이동건 등 연예인들로부터 수염열풍이 불기 시작해 수염은 꽃미남을 터프가이로 변신시키기도 하였다. 꽃미남을 좇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 남성스러운 터프함을 강조하는 수염으로 표현된 측면도 있다. 언젠가 “남자 배우, 뜨려면 지저분해져라”는 기사까지 나왔었다. 해외도 예외는 아니다. 베컴은 수염을 기르면서 튀는 스타일리스트로 거듭났으며 브래드 피트도 수염이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빈티의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서도 확실한 유행코드로 자리 잡았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도시인들의 '일탈'과 '자유'의 구현과도 맞물려있다. 온라인 동호회도 수십 개나 생겨났다. 그러나 수염이 누구에게나 다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수염을 가꾸고 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칫 기르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매일 아침 수염을 다듬는 공을 들일 정도면 자연스레 헤어스타일과 옷에도 신경을 쓰고 되레 신경 쓸 것이 더 많을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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