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천수호
이번 설에도
팔에 물집이 생겼다
달구어진 프라이팬 모서리를 스친 자국이다
명절 때마다 화상 자국이 생기는 것은
내 안의 기포들이 올라오면서
말 못할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가집 며느리의 고단한 기포들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물집을 밀어내는 거다
그 속내 드러내기 위해
화상을 입는 거라면
불은 이미 내 속에 있었던 것
그렇다면 물집은
폭발 후 떠오르는 버섯구름이다
까맣게 탄 속 긁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들끓는 몸부림이다
- 계간 《열린시학》 200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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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라고 모든 사람이 다 기꺼워하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설에도 귀향이 망설여지고 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물질적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부터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주부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명절은 그저 난처한 상황일 따름이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한다. 이른바 명절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이다. 이는 전통적인 관습과 평상시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이다.
장거리 운전, 과식 과음, 가사 노동,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심적 갈등 등은 명절 증후군의 원인들이다. 명절을 치르면서 주부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이 전 부치기 같은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앉았다 일어날 때면 무릎까지 뻐근하고 아프단다. 시에서처럼 프라이팬에 스치고 뜨거운 기름에 데이는 화상환자도 있다. 명절 뒤끝에 찾아오는 후유증만이 아니다. 기억이 번뇌를 초래하여 명절만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지난 명절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여러 스트레스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고단한 기포들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물집을 밀어내는 거다’ 물론 이는 종갓집 며느리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지금껏 많은 기혼여성들이 겪어왔고 앓고 있는 몸살로 ‘며느리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증상은 핵가족화 된 가정의 주부들이 명절기간동안 대가족제도에 일시적으로 편입되면서 정신적·신체적 부적응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이다. 명절은 온 가족이 함께 어울려 나누고 즐겨야 마땅하거늘, 며느리 된 ‘죄’로 차례음식을 도맡아 준비해야하는 까닭에 불만이 쌓여도 나 하나 참고 안으로 삭여야만 하는 사실에 그 화근이 잠복되어 있다.
게다가 흩어져 있는 가족이 모이다 보니 시부모, 동서, 시누이들 간에 생기는 심리적인 갈등과 알력도 만만치 않다. 사실 여성들의 명절증후군은 육체적 노동도 큰 몫을 차지하지만, 더 큰 원인은 대부분의 남성들이 차려준 상 받아먹기만 하고 TV채널이나 돌려가면서 탱자탱자하거나 술 취하면 드러누워 낮잠이나 자며 ‘나몰라’라 하는데 있다. 오직 여성들만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억울함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데, 요즘은 이러한 현상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까닥하다간 한 대 얻어터지거나 자칫 이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종갓집 며느리의 스트레스 강도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노동량이야 일반가정보다 많겠으나 종부를 중심으로 가족구성원 모두가 가사노동 분담과 긍정적인 사고, 상호 이해와 세심한 배려, 협조가 있기에 증후군으로 번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내가 아는 양동 ‘무첨당’ 회재 이언적 종가의 종부인 신순임씨(시인이기도 한)의 경우도 그렇다. 애당초 종가의 가문과 전통을 이을만한 품성과 솜씨인지를 확인하고 들여졌다는데, 가끔 힘이 든다며 새침해하고 푸념을 할지언정 ‘까맣게 탄 속 긁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들끓는 몸부림’따위는 없는 것 같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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