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모든 2 2018. 4. 13. 23:10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시집어머니, 우리 어머니(문학수첩,2005)

 

 

김종해 시인의 이 시는 원래 시집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에 들어있는 것이지만 동생인 김종철 시인과 함께 어머니를 그리는 시편들로만 각 20편씩 한 권으로 묶은 공동 시집 <어머니, 우리 어머니>에 재수록된 작품이다. 두 분 다 신춘문예를 통해 나란히 등단, 출판사 경영과 문예지 발행을 분담하다가 김종철 시인은 4년 전 췌장암이 재발하여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다른 형제애는 문단에 잘 알려진 바며, 그들 형제의 사모곡은 더욱 유명하다. 공동시집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를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았다.


시편들에서 그들이 건너온 유년기와 소년기의 삶까지도 또렷이 그려지는데, 생활의 궁핍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이 어떻게 전해지고 그들에게 녹아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형제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은 사정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때늦은 후회와 그리움은 늘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뒤에야 더 절절하고 격렬히 치밀어 오르지 않았던가. 내 경우 천년만년이나 사실 줄 알고 걸핏하면 놀려먹듯 핀잔을 주고 밖에서 발화한 온갖 짜증을 어리광처럼 부려놓곤 했는데 2년 전 황망히 가신 뒤 지금 이토록 통렬하게 가슴을 쥐어뜯을 줄이야.


같은 시집에 수록된 김종철 시인의 시 <엄마 엄마 엄마>를 읽다가 기어이 복받치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사십이 넘도록 엄마라고 불러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싫지 않으신 듯 빙그레 웃으셨다. 오늘은 어머니 영정을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불러 보았다. 그래 그래, 엄마! 하면 밥 주고, 엄마! 하면 업어 주고, 엄마! 하면 씻겨 주고, ! !...엄마! 하면 그 부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기도인 것을!” 나도 호흡기를 입에 문 엄마의 귀에다 엄마!를 수없이 부르고 기도했던지.


섣달 그믐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턱을 고이고 코딱지처럼 달라붙어 졸고 있는 내게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했다가 종래엔 방안으로 옮겨 이불을 덮어주시곤 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내가 철없이 날린 방패연의 꼬리만 가물가물하다. 어머니가 빚어주지 않은 설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은 상황은 상상조차 못했다. 어머니와 나는 혈육 사이의 유대 이상이었다. 그런 어머니인데 호강은커녕 내내 근심만 안겨드렸다.


고운 모습 저리 늙어갈 동안 기껏해야 내 볼일로 차를 같이 타고 가서는 밖에다 방치해두는 게 고작이었다. 지지난 해엔 병원에서 설을 맞이했고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설날은 올해가 두 번째다. 어머니는 여전히 하늘에서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실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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