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手話/ 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 198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화는 말과 글이 아닌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시는 그 수화의 방식으로 한 가난한 어촌 중학교의 졸업식 풍경과 ‘지방대학 국문과’(전남대) 출신 교사의 졸업식에 얽힌 감회를 내밀하게 그리고 있다. 시인의 서정적 손짓 언어를 가만 따라가 보면 해조음과 끼룩끼룩 갈매기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옛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어촌의 학부모가 기성회비 대신 생선이나 김 따위를 놓고 가기도 했으며, 쥐꼬리 월급에서 몇몇 아이들의 기성회비와 수업료를 대납해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도 계셨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인생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묘사한 괴테의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육성회비’를 안 냈다는 이유로 졸업장을 볼모로 잡아두던 시절도 있었다. 수업료를 내지 않으면 등교를 해도 결석 처리되고, 그래서 졸업이 안 되니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나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도 그런 처지일는지 모르겠다.
졸업식은 학교와 학생, 스승과 제자, 그리고 학부형이 남고 떠나는 극적인 이별의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은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졸업생들을 울리는 일이란 없다. 물론 국민의례로 시작해서 모범생 시상, 교장선생님의 훈시, 내빈 축사, 재학생 대표의 송사, 졸업생 대표의 답사 로 이어져서 교가를 제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졸업식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지만 요즘은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학교도 있다. 졸업식 일자도 당겨져서 제주의 일부 학교는 12월 말에 거행하기도 하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복을 찢거나 밀가루를 뿌리고 날달걀을 투척하고, 알몸 뒤풀이까지 벌이는 분탕을 쳤지만 지금은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어 그런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졸업은 당연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하지만 항상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환하게 웃지만 또 누구에게는 쓴 울음일 수도 있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끝 소절처럼 어떤 단계의 졸업이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어렵게 학교를 마친 곤궁한 아이들에게 하늘을 비상하는 갈매기의 꿈이 찬란히 펼쳐지기를 응원한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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