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느티나무 뒤주/ 허정분

모든 2 2018. 4. 13. 22:54




느티나무 뒤주/ 허정분

 

어른들 손때가 묻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던 쌀뒤주를

육촌 형님이 우리 집 아궁이 땔감용으로 주셨다

 

뿌옇게 먼지 쓴 하 세월의 부질없음이

겹겹이 쌓인 몸피 쌀 두 가마쯤은

너끈히 품었을 텅 빈 뒤주 안

얼룩진 창호 벽을 노린재 두 마리 유영중이다

 

시숙님 어릴 때 솜씨 좋은 할아버지가

아름드리 느티나무 베어다 직접 짜셨다는 뒤주

한 가족의 호구지책에 기꺼이 몸 바친 나이테가

한 줌 다비식으로 열반에 들 운명이다

 

오래 전 두랭이 댁으로 불린

퇴락한 양반가문 대청마루에서

달그락 자물쇠 열리면

아이들이 뼈를 세우던 전성기

배부른 노래에 신주처럼 위하던 대접도 있었지만

 

꼭 닫힌 수 십 년의 적막강산, 침묵으로 깔려있어

한 겹 바람조차 통과를 거부하는 밀봉의 사연들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불멸의 궤적으로 읽고 있다.

 

- 시집 울음소리가 희망이다(고요아침, 2014)



  달집을 태우고 둥근달에 소원을 비는 손들을 보았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서도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별똥별을 보기에 앞서 먼저 별을 봐야하고, 언제일지 모를 별똥별과의 조우가 이뤄진다고 해도 그 순간은 너무나 짧다. 그 순간을 포착해 소원을 빌지 못하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유성우의 타이밍에 맞춰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항상 가슴속에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망의 간구조차 불가능하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의 기도와도 같은 간곡한 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성취는 알고 보면 간절함의 분신이다. 그 갈망을 대신하는 이름은 사랑이다. 간절함은 사랑의 은유이며 그래서 사랑이 위대한 까닭이다. 사랑이 이뤄지길 깊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열망이야말로 꿈을 현실로 바꾸는 원동력이다. 다만 그 소망과 절실함에는 진정이 배어있어야 한다. 소원을 비는 그 마음이 간절하고 진실하다면 우주의 기운은 그것에 우호적으로 반응한다. 이를 천지신명의 도움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의 응답이거나 부처님의 가피라 해도 무방하다. 최근 무슨 일로 잠시 우울해져있을 허정분 시인에게도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는다.


  허정분 시인은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열미리 능성구씨 집성촌에 시집을 가서 줄곧 40년 넘게 살고 있다. 가문과 전통을 귀히 여기는 족친들과의 이런저런 문화적인 갈등도 없진 않았을 터이지만 시인은 대체로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 전통과 가문의 내력에 대한 깊은 긍지와 자부심마저 갖고 있다. 전통적 가치관은 모름지기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존중하는 삶인데, 거기에 어떤 물리적 힘이 가해지면 그때부터 질서는 뒤틀리고 변질된다. 정신적 가치를 외면하고 줄기차게 편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도 그렇다.


  도대체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과 정신을 비틀어 놓는다.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하찮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이 시는 바로 이 점을 환기시킨다. 쌀뒤주는 오랜 세월 한 집안의 양식을 저장하는 중요한 살림살이다. 단지 쌀을 저장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한 가정을 듬직하게 지키는 위엄 있는 존재로서 신성시 여겼다. 광의 열쇠와 함께 뒤주 열쇠는 경제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런 쌀뒤주가 하루아침에 아궁이 땔감으로 전락할 처지였으니 시인으로서 어찌 복잡한 상념에 젖지 않을 수 있으랴. '꼭 닫힌 수 십 년' '밀봉의 사연들을' '사도세자 불멸의 궤적'으로 읽는 시인의 너른 상상력의 뼘도 함께 본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