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160

감꽃/김준태

감꽃/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참깨를 틀면서/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워/유안진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워/유안진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비로소 가만 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 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싸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주는 사람과 얘기 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히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다웠으니.. 앞으로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가슴이 영원한 느낌을 채워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들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되어도 일등이 못되어도 출세하지 못해도 고루,고루 갖춰놓고 달리지는 못해도 우..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이원규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이원규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산모퉁이 돌아오는 시골 막버스처럼 오기 전엔 도대체 알 수 없는 전화벨처럼 오는가 마침내 사랑은 청천하늘의 마른번개로 온다 와서 다짜고자 마음의 방전을 일으킨다 들녘 한복판에 벼락 맞은 채 서 있는 느티나무 시커멓게 팔다리 잘린 수령 오백년의 그는 이제서야 사랑을 아는 것이다. 사랑과 혁명 그 모든 것은 비로소 끝장 나면서 온다 제 얼굴마저 스스로 뭉개버릴 때 와서 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북극성/이원규 숲속에 홀로 누운 밤이면 나의 온몸은 나침반 그대 향해 파르르 떠는 바늘 밤새 외눈의 그대 깜박일 때마다 나의 몸은 팽그르르 돌아 정신이 없다 극과 극의 사랑이여 단 하룻밤만이라도 두꺼비집을 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