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156

도로시 데이 영성센터 2020년 겨울호

그분을 마중 나가는 종착역 한상봉 참 오랜동안 자발적 유폐(幽閉)의 시간을 살았다. 코로나 역병 때문만은 아니다. 자책과 성찰의 시간으로 지난 일 년을 보내면서,굽었던 등위로 싹이 터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그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서둘러 시작한 일 때문에 빚어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삶이란 성장하는 때가 있으면 매듭을 짓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매듭을 옹글게 지어야 대숲을 울리는 나무들처럼 푸른 푯대를 세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파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집밖으로 애써 나가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즈음에 말로가 부른 이란 노래를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은 이 유폐를 풀라는 ..

공론화의 폭력

공론화의 폭력 장영식 핵발전소를 가동하면 배출되는 연료가 있습니다. 보통 '사용후핵연료'라고도 하며,'고준위핵폐기물'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준위핵폐기물은 사람이 스치기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는 치명적인 핵폐기물입니다. 문제는 이 고준위핵폐기물의 반감기가 약 10만 년입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100세라고 가정했을 때, 최소한 10만 년을 보관해야 그 반감기를 맞아 다시 오만 년을 저장해야 합니다. 오만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반감기를 맞게 되고, 그 반감기의 시간을 계산하면 상상하기 힘든 시간 동안 저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핵쓰레기를 저장하는 이른바 '맥스터'라고 부르는 핵스레기장 건설 문제로 이루어진 '공론화'가 뜨거운 감자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핵쓰레기장 재공론화 문제는 박근혜 ..

나는 왜,어떻게 인권운동을 하는가

나는 왜,어떻게 인권운동을 하는가 오창익 처음부터 인권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다. 내 또래에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대개 광주학살의 영향이었을 게다.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직업이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첫 직장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재단)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교사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딱지는 상처 다음이었다. 두 번째 직장은 천주교인권위원회(인권위)였다. 단체 이름에 '인권'이란 말이 들었으니,인권운동을 맘껏 할 수 있었을 텐데,단체는 민원 위주로 돌아갔다. 물론 특수에서 보편을 뽑아내듯 민원 활동을 통해 제2,제3의..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시대에도 대학이 필요한가?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시대에도 대학이 필요한가? 박병상 반년 넘게 아침 10시가 되면 뉴스에 신경을 쓴다. 코로나19 현황을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기 때문이다.하루하루 일희일비하는 건,확진자 추이가 2학기 수업 방식과 연계될 거라 학교에서 통보한 까닭이다. 이러다 다음 학기도 비대면 온라인 수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 아닌가? 법이 바뀌자 나이 든 강사를 외면하는 와중에 구제해준 대학이 있어 강의를 구차하게 이어간다. 학생들이 후하게 평가했기 때문일지 모르는데,자고로 평가는 엄정해야 한다. 다른 이를 평가하기에 앞서 평자는 자신을 냉정하게 반추해야 하건만,요즘 대학마다 준비 없는 학생에게 선생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다. 엄정할 수 있을까? 대학마다 다르겠지만,평가 결과는 시간강사에 혹독할 수 있다. 강사 ..

고승하 음반 있습니까?

고승하 음반 있습니까? 김유철 몰라서 다행인 사람 여름호에 실린 한상봉 칼럼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중에 안치환이 부른 '고백'의 작곡가 고승하 선생이 인용되어 깜작 놀랐다. "내친김에 한번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고승하를 아시나요?"라고 말이다. 선생은 1948년생이니 올해 칠십하고도 몇 년 넘었다. 그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았고 한국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한 예술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물론 이것은 순 필자의 생각일 수 있다.) 사실은 소수만 안다고 하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이름없는 곳에 하가로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고승하는 여전히 개구쟁이처럼 동요,시노래,가요,성가를 분별없이 짓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등단 30년 동안 시집..

가난한 교회는 없다 가난한 사람만 있다

가난한 교회는 없다 가난한 사람만 있다 조기동 한 분이 가난한 사람 편들기를 강조하기에,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 지나치게 이분법으로 세상사를 보는 것은 아니냐고 했더니,대뜸 '버르장머리 없는 00"라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법은 단순해서 설명하기가 좋습니다. 청군 이겨라,백군 이겨라. 민주당과 공화당,가난한 교회와 부자 교회 이렇게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멋진 말입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를 제외하고 교회가 가난한 적이 있었던가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부자 교회가 되고 싶은 가난한 교회는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사실 가난한 교회가 아닙니다. 오직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고자 하는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교회라는 낱말이 책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많은 사람들은 ..

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Book Review 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한상봉 본회퍼,복있는 사람,2016 디트리히 본회퍼(Didtrich Bongoeffer)라는 이름을 들으면 단박에 히틀러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된 예언자적 신학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 먼저 앞을 가로막는다. 본회퍼는 테겔 군형무소에서 편지를 쓰며,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자신이 고난당하는 것을 하느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으로 여겼다. 1945년 4월 9일 본회퍼는 플로센뷔르크 형무소에서 처형되어,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처럼 시신이 불태워졌다. 전쟁 막바지였다. 그러나 본회퍼의 죽음은 그가 하느님에게서 얻을 자유로 가는 정거장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순교자들처럼 그는 의연한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서 오라,영원한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여..

주고받는 사랑,참 어려운 사랑

주고받는 사랑,참 어려운 사랑 최태선 은퇴목사 요즘 사람들과 만나 식사를 하면 함께 식사를 하신 분들이 열이면 열 모두 제가 돈을 내지못하게 합니다. 저는 누구에게서든 식사 대접을 받으면 다음엔 반드시 제가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접을 하고 거기다 돈 봉투까지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부러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겐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가능하면 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참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저는 늘 대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제겐 마음 편하지 않은 일입니다.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빵을 만들어 나가기..

꼰대 말고 어른이 필요한 사회

꼰대 말고 어른이 필요한 사회 김경집 세상이 빠르게 변하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요즘은 갈수록 더 실감한다. 기술과 정보의 속도는 우리의 예측과 준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내가 감당할 속도를 넘기에 처음에는 어찌어찌 따라가려고 애쓰다가 금세 포기한다. 최신 정보와 기술의 유효기간이 3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니 배우다 지칠 바에야 차라리 적당히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자위한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조차 변화의 속도를 다 감당하지 못하는데 기성세대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그러나 조금씩이라도 변화에 순응하려는 노력까지 거두는 순간 우리는 도태된다. 그런데 스스로 도태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는 나름의 자산이 있다고 여..

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었다 제임스 마틴 신부 S.J. 워너 샐먼(Warner Sallman, 1892-1968)의 유명한 그림(Head Christ)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백인 얼굴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여러분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내 답변은 먼저 예수님 생김새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에 그분 생김새가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그분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작은 시골 출신임을 뜻하는 총서인 (A Marginal Jew)에서 존 마이어 신부가 말한 것처럼, 유럽식 모습의 예수님에게 익숙한 사람들은 오늘 정작 예수님을 직접 뵈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갈릴래아의 남자들은 보는 것으로도 그분의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다. 둘 다 이름이 마헤르인 내 친구들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