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주고받는 사랑,참 어려운 사랑

모든 2 2020. 9. 22. 10:04

 

주고받는 사랑,참 어려운 사랑

최태선 은퇴목사

 

  요즘 사람들과 만나 식사를 하면 함께 식사를 하신 분들이 열이면 열 모두 제가 돈을 내지못하게 합니다. 저는 누구에게서든 식사 대접을 받으면 다음엔 반드시 제가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접을 하고 거기다 돈 봉투까지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부러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겐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가능하면 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참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저는 늘 대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제겐 마음 편하지 않은 일입니다.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빵을 만들어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런 귀한 선물을 공짜로 받으면 안 된다고 빵 값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제가 빵을 파는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그 사람을 생각하며 드린 제 정성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그분의 마음이 못마땅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분이지만 몇 해 전 뒷산 공원에 노숙자 선생님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분과의 대화 중 짜장면 곱배기가 삼천오백 원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면 만오백 원을 드렸습니다. 짜장면을 세번 사 드시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매일 산을 오를 때는 사실 그분을 좀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돈을 드릴 여유가 제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가능한데 사실 그분은 날마다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분은 대개 머무는 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산 밑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있는 그분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그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귀신같이 내 발자국 소리를 구분하고 내가 지나가기만 하면 일어나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에게 돈을 드리면'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서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게 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떤 땐 자신이 빨아놓았던 양말을 주려고 하기도하고 수건을 주려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먹다 만 반쪽짜리 빵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제겐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와 만났을 때 제가 돈을 못 내게 하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다보니 그때의 노숙자 선생님이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분도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제게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찮고 더럽기까지 한 것들이었지만 그분에게는 쓸모가 있고 또 변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제가 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렇게 귀한 것을 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받아주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 기뻤을까요. 어쩌면 제가 준 돈보다 그것이 더 기쁠 수 있었다는 걸 저는 몰랐습니다.

 

by Julie Lonnemam

 

 

  사흘 전 한 분이 제게 옥수수를 보냈다는 전갈을 듣고 저녁 내 빵을 만들었습니다. 카스테라와 콘 브레드 두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옥수수를 보내시는 분에게 자녀들이 있고 부모님들도 계시다는 것을 페이스북을 통해 보았기 보았기 때문에 가급적 만들었습니다. 에어 프라이어로 만드는 것이라서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최대용량으로 그 두가지 빵을 세 시간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우체국이 열리자마자 그것을 부쳤습니다. 다음 날 고맙다는 페이스글이 왔습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집에서 만든 빵도 빵집 빵처럼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습니다. 참 시골스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골스러움이 정겹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저희 온 식구가 옥수수를 잘 먹었고 그분은 제가 보내드린 빵을 잘 드셨습니다.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니 행복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일은 사랑하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주기만을 원하거나 받기만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주어야만 행복하고 받아야만 행복합니다. 하지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조건 없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줄 능력이 없어 주고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라도 이미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서로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살아있는 가장 생생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이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의 존엄을 해치는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럴 땐 돈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제게 돈을 못 내게 하는 것은 분명 저를 사랑하려는 시도이지만 그것이 제 존엄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 연기(演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환대가 사람 연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학자 김연경 님의 정의를 정말 좋아합니다. 생각해 보니 환대도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환대 역시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참으로 요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교회는 바로 그런 관계를 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는 '싸움 하는 곳'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이 실재인 곳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진리는 참 심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서로 사랑하기까지는 참으로 깊은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오래 전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나오는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사랑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법이다."

 

  서로 사랑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힘과 경쟁이 기조가 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뒤로 물러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최근에는 제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점점 더 감사해집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악악거리며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일처럼 보기 싫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나이 듦은 그 일을 쉽게 해줍니다. 해도 안 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눈꼴사나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 듦은 수동의 영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수동의 영성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동의 영성은 내면에 응축된 에너지를 가지도록 해줍니다. 죽는 날까지 열정을 다해 살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역설의 아이러니가 수동의 영성에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미숙한 단계의 수동의 영성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생각하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사람을 만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짜장면을 제일 좋아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회가 나오고 장어가 나오고 합니다. 새삼 서정주 시인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인생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가 쉽게 써지는 게 부끄럽다고 했지만 저는 시가 그렇게 쉽게 써지는 시인이 참 부럽습니다. 저도 시인처럼 사랑의 시를 그렇게 쉽게 써 내려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