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35

신리 성지(1)

성당 벽면에는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과 다섯 성인의 대형 부조상이 설치되어 있다. 신리 성지가 위치한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는 내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신리 성지(1)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1784년 이후 신리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충청도 서북부 지역 즉 지금의 당진,서산,예산,홍성,청양을 일컫는 내포라는 지명은 '안쪽에 자리 잡은 갯가'를 의미한다. 이 내포지방은 삽교천과 무한천 두 물줄기가 평야와 어우러져 자궁모양을 하고 있는데,조선 시대에 수용된 천주교의 모태로서 '신앙의 못자리'역할을 하였던 지역이다.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는 1784년 여사울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지자)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

수리치골 성모 성지

수리치골 성지 전경 항공 성모 성심회의 뜻을 계승하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의 총원이 자리하고 있으며,성모당,십자가의 길,성체 조배실, 피정의 집,순례길 들이 조성되어 있다. 수리치골은 수리취 나물이 자생하는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확한 위치와 주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현재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록에 따라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로 여기고 있다.이곳은 박해시대 때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교우촌 중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용수골,덤티,진밭,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이러..

솔뫼성지(2)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경당 솔뫼 아레나 광장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복자품,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가톨릭 교회의 성인품에 올려졌다. 그로 인해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경과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솔뫼성지의 성역화는 합덕 지역 교우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합덕성당의 크램프 신부는 1906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를 고증하였고,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1977년 김대건 신부상을 봉헌하였고,1983년 솔뫼 피정의 집을 완공하면서 솔뫼성지는 신자들이 순례와 함께 피정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만 5천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와 더불어 200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

솔뫼 성지(1)

솔뫼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동상 솔뫼 성지(1) 한국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지 솔뫼는 '소나무가 산을 이루고 있다'하여 순우리말로 이름 붙여진 곳으로,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장소이다. 178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큰할아버지 김종현과 할아버지 김택현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1801년에 시작된 신유박해로 인해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는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1804년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 해미에서 옥사하였다. 또한,작은할아버..

성거산 성지(2)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 성거산 성지 제2줄무덤 성거산 성지(2) 박해시대 형성된 교우촌,선교사들의 사목중심지 1866년 11월 16일 (양력)에는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와 채씨 며느리 등이 체포되었다.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는 교우촌에서 열심히 묵상기도와 염경기도를 바치며 늘 치명의 뜻을 가지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혀 갖은 고문과 박해를 받았지만,끝가지 신앙을 지켰다. 최천여 베드로는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금세는 잠깐이요,후세의 세계는 영원이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설득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는 동생 최종여 라자로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과 함께 12월 14일(양력)공주 진영에서 순교하였다. 이들과 함께..

성거산 성지(1)

소학골 교우촌터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 주교,두세 신부,베르모렐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는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천안시 성거읍,북면,입장면에 걸쳐 위치한 성거산(聖居山)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직산면 수헐원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령(神靈)이 사는 산이라 하여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를 써서 성거산이라는 명칭을 지어 주었고 친히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왕도 이곳에 와..

배나드리 성지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는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그렇구 말구,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를 되뇌었다고 한다. 배나드리 성지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불렀다.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이 많이 들어오거나 홍수가 나면 사방에 물이 차서 섬이 되어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런 자연환경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마을이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다. 체포..

서짓골 성지

야외 제대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야죄 제대 옆에 서짓골 순교성인유해 이전 봉안 약사가 새겨져 있다. 서짓골 성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네 분의 성인이 묻혔던 곳 서짓골 성지는 충남 부여군 외사면에 있는 성지이다.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해변의 사형장에서 다섯 분의 성인들은 참수 처형된 후 그분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효수되었다. 매달린 그분들의 머리 밑에는 각각 '안가(安家)''오가(五家)'등의 글자를 쓴 팻말이 달려 있었다. 효수 기간이 지난 후 머리와 알못을 일치시켜 칡넝쿨로 묶어서 각각 그 시신별로 '안가(安家)''오가(五家)'등의 글자를 쓴 팻말을 머리에 덮어 모래 자갈 바닥에 묻었는데,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를 함께 묻고 다른 세 순..

삽티 성지[7]

188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묘원 안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고,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을 새겨 놓았다.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도앙골 성지[6]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 사목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야외에 제대를 만들어 노천성당으로 꾸며 놓았다. ▼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2011년 12월 22일 전임 교구장 경갑룡 요셉 주교 주례로 제막식이 열렸다. 현재의 행정 명칭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은 오래전부터 도앙골이라고 일컬어 왔다.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 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도앙골'은 이 마을 계곡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 하여 생긴 도원곡(桃園谷)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50년 1월 (혹은 1849년 말)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