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수리치골 성모 성지

모든 2 2020. 9. 6. 19:29

수리치골 성지 전경 항공

 

성모 성심회의 뜻을 계승하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의

총원이 자리하고 있으며,성모당,십자가의 길,성체 조배실,

피정의 집,순례길 들이 조성되어 있다.

 

 

 

  수리치골은 수리취 나물이 자생하는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확한 위치와 주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현재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록에 따라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로 여기고 있다.이곳은 박해시대 때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교우촌 중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용수골,덤티,진밭,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정해주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수리치골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1846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는 병오박해가 발생하자,당시 교구장이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첩첩산중인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1846년 11월 2일 박해받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성모 성심회가 발족되는데,이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청설하였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수리치골은 교우촌이라기보다는 한 가족만 겨우 사는 외딴 곳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근 지방의 신앙적 중심지가 되었다. 하여 신자들은 주일마다 수리치골에 모여 전 세계 회원들과 뜻을 모아 조선 교회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페레올 주교님이 1864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키면서 수리치골의 가치가 다시 신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성모 성심회의 뜻을 계승하는 '미리내 성모 성심수녀회'의 총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모당,십자가의 길,성체 조배실,피정의 집,순례길 등이 조성되어 방문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모님과 함께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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