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기록화는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을 시작으로 강경 포구 상륙. 신리 성지에서의 사목활동,박해와 순교에 이르기까기 1점당 1000호에 가까운 대형 장지에 우리나라 전통 채색기법으로 섬세하고 장중하게 그려냈다.
신리 성지(2)
'내포의 사도'이존창이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1784년 이후 신리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이다. 이후 1866년 흥선 대원군의 명에 의해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한양,수원,홍주,해미,보령 갈매못,공주 등에서 4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들 중 1866년 3월 30일, 성 손자선 토마스는 공주에서,성 다블뤼 주교,성 오메트르 신부,성 위앵 신부,성 황석두 루카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의 길에 이르게 되는데, 후에 이 다섯 분은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남원군 도굴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큰 박해가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피난을 떠나게 되고, 신리를 포함한 내포지역 교우촌 전체는 붕괴될 만큼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할 형편이 못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결국,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로 인해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단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신리에는오랫동안 신자들이 터를 잡지 못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하는 주민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유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리는 조선 시대 내포 교회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과 선조 신앙인들의 땅으로서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회복해야 하는 소중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에 지금의 합덕 성당을 세우고 난 뒤,1823년 신리에 공소가 설립되게 되었다. 1927년 신리 신자들은 성 다블뤼 주교가 지냈던 성 손자선 토마스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집은 처음 지을 때 사용했던 대들보,서까래,주춧돌,상량문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성인들의 손길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신리성지는 과거 선조 신앙인들이 살았던 장소를 현대적으로 잘 표현한 순교자 기념 공원과 야외에서 다섯 성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야외 경당이 조성되어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순교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데,이 미술관에는 일랑 이종상 화백이 봉헌한 다섯 성인의 영정화와 13점(1000호)의 순교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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