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서짓골 성지

모든 2 2020. 7. 29. 03:14

 

야외 제대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야죄 제대 옆에 서짓골 순교성인유해 이전 봉안 약사가 새겨져 있다.

 

 

서짓골 성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네 분의 성인이 묻혔던 곳

 

 

  서짓골 성지는 충남 부여군 외사면에 있는 성지이다.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해변의 사형장에서 다섯 분의 성인들은 참수 처형된 후 그분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효수되었다. 매달린 그분들의 머리 밑에는 각각 '안가(安家)''오가(五家)'등의 글자를 쓴  팻말이 달려 있었다. 효수 기간이 지난 후 머리와 알못을 일치시켜 칡넝쿨로 묶어서 각각 그 시신별로 '안가(安家)''오가(五家)'등의 글자를 쓴 팻말을 머리에 덮어 모래 자갈 바닥에 묻었는데,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를 함께 묻고 다른 세 순교자들은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수습작업으로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다. 한편,장주기 요셉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을 찾아가 시신 수습 협력을 요청하였지만,신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남포현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들과 신자들이 장노첨과 더불어 갈매못 현지에 가게 된다. 그 일에 참여한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 이치문 힐라리오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병인 4월 초9일(양력 1866년 5월 22일)에 죄인(이치문)과 죄인의 형 둘 이뀌수(요한 그리소스토모).이(치서) 이냐시오와 이(성여) 바르나바와 김성집과 장 회장의 아들(즉 장노첨)과 또 다른 교우 몇이 가서 안 주교,오 신부,민 신부,장 회장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니까 날이 샜습니다. 빨리 염해서 10리 되는 곳으로 모셔다가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 없이 묻었는데,그 후에 말을 들으니 짐승들이 송장을 파먹는다고 해서 죄인의 부친(이 바오로)이 무덤 자리를 가 보고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고 해서... 가서 시신을 파서 외인 최가의 배에 실었습니다. 바람이 대단히 불었기 때문에 보름 동안 고생하다가 간신히 남포 서지둥(서짓골)에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네 시신을 관 없이 묻고 봉분으로 덮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인 1882년 당시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였던 블랑(Blane) 신부는 박해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고 사회가 혼란하여 유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발굴을 지시하고 일본 나가사키의 오무라 대성당으로 옮겼다. 1894년 5월 22일에 다시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고, 1900년 9월 10일에는 주교좌 명동성당의 지하로 안치되었다가,1967년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지하 성당에 현재까지 안치되어 있다.

 

  산골 교우촌이었던 서짓골은 1990년대 들어 보령댐이 건설됨에 따라 지금은 댐의 물은 충청남도의 서부지역,옛 프랑스선교사들이 '내포지방'이라 부르는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서짓골에 묻혀 있던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열정적 신앙이 지금은 영적 샘물이 되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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