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마을에 위치해 있다.
대흥봉수산 순교성지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는 '의좋은 순교자'가 되어 주님 품에 안겼다.
충남 예산군의 대흥봉수산 순교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마을에 위치해 있다. 복자 김정득 베드로는 예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복자 김 베드로는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복자 김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입교 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복자 김 베드로는 복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었다. 이후 복자 김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복자 김 베드로가 끌여오자마자,그를 배교시키기 위하여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복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복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복자 김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헤어질 시간이 되자,그들은 "내일 정오,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복자 김 베드로는 예산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복자 김 안드레아는 예산에서,복자 김 베드로는 대흥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칼날 아래 목수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 복자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서로 약조대로 한날한시에 '의좋은 순교자'가 되어 주님 품에 함께 안겼다.
조선시대의 처형지는 내천변(奈川邊)이라는 곳으로 지금은 예당호에 수몰된 지역이기에 현재의 성지는 순교자들이 심문을 받고 고문을 받았던 대흥관아인 대흥동헌 옆에 위치해 있다. 성지 안에는 '대흥옥', '조리돌림 하던 저잣거리','순교한 참수터'등을 재현한 순교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성지 옆 대흥동헌 바로 앞에는 교과서에 실린 고려말기 이성만,이순 형제를 기리는 '의좋은 형제비'와 공원이 있기에 순교신앙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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