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출신 순교자로 유일하게 성인품에 오르신 성 조화서 베드로와
조윤호 요셉 성인이 원뿔 조형물 꼭대기에 십자가를
형상화한 소나무 옆에 서 있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최양업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을 함께 다녔는데,
이를 순교자 기념 원뿔에 새겨 넣었다.
남방제 성지(1)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라는 말은 제방 둑이 'ㄱ'자로 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200여 년이 넘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듯하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병인박해(1866년)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5년 수원 도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였다. 신창 남방제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고, 1848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고 한 막달레나가 죽었고,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 조 베드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포졸들에게 잡혀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성 조 베드로가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려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 1864년 성 조 베드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옥에 갇힌 성 조 베드로는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고 한다.
전라 감사는 성 조 베드로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협박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세찬 칼을 세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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