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배나드리 성지

모든 2 2020. 8. 2. 23:44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는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그렇구 말구,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를 되뇌었다고 한다.

 

 

배나드리 성지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불렀다.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이 많이 들어오거나 홍수가 나면 사방에 물이 차서 섬이 되어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런 자연환경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마을이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다.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 가량인데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송 첨지 요셉,손연욱 요셉,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옥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민 첨지는 결성(結成)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것으로 보아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배나들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이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삽교읍 용동 2리)에서 태어나 평소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여 살다가,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에 끌려갔다. 이후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로 이송되었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 권면하면서,갖은 형벌과 문초와 형벌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 죽여라.'라는 명에 매질을 당하여 순교하게 되었다.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그렇구 말구,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이렇게 1800년 1월 9일 6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880년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으니 아마도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나를 짐작게 한다. 그렇기에 순교와 배교 사이에 있었던 신앙의 선조들의 마음을 다시금 헤아려 볼 수 있는 성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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