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골 교우촌터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 주교,두세 신부,베르모렐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는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천안시 성거읍,북면,입장면에 걸쳐 위치한 성거산(聖居山)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직산면 수헐원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령(神靈)이 사는 산이라 하여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를 써서 성거산이라는 명칭을 지어 주었고 친히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왕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충남 천안시 입장면에 있는 성거산 성지 일대는 1800년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있었다. 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신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덜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공동체였다.
성거산 교우촌은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곳 곳이었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천안 삼거리가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주변에 인접한 공주와 서천,충북 배티,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 교우촌에 순방을 다녀갔고,일부는 교우촌에 와서 휴식과 사목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 주교,최양업 신부,메스트르 신부,페롱 신부,프티니콜라,칼래 신부 등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거산 출신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 11월 14일(양력) 소학골 교우촌에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배문호 베드로와 고의진 오셉이 체포되었다. 고의진 요셉은 소학골 교우촌에서 살며 배문호 베드로와 친하게 지내면서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약속하곤 했다. 둘이 잡혀 옥에 있을 때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함께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 순교를 권면하였다. 이들의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은 통회하며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압송되기도 했다. 19세의 고의진,23세의 배문호는 12월 14일 공주 진영에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