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48

덜 붐비고 더 평화로운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7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내 딸 결이 생각을 하며 잠시 속으로 웃었다. 윌리엄 코퍼스웨이트가 쓴 라는 책인데,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책의 한쪽에선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과 나날을 아름다움보다 추함을 더 자주 마주보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매일을 하루같이 ‘칙칙하고 허무 맹랑한 것, 천박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것’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인데, 인천에서 지금 잠시 빌려 살고 있는 인천 집만 돌아봐도 금방 그게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연립주택에서 무슨 작업이라도 한답시고 창가에 책상을 두고 앉아 있으면, 아침녘부터 소음에..

기자영, 박남인, 장진희, 김민해, 이현주...이들 안에 내 안에 계신 하느님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6 경주에 와서 1년 만에 아파트 생활을 접고 주변이 논으로 둘러싸인 개인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마당도 넓고 텃밭도 있는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로 한 주일이 지났지만, 주변 정리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주방과 안방, 사랑방, 책방으로 옮겨다니며 짐을 정리하고, 마당에서 풀 뽑고 텃밭엔 고추를 심었다. 오랜만에 호미며 괭이를 잡아 보니 연신 흐르는 땀이 콧등에서 미끄럼을 탄다. 힘들지만 새삼 느끼는 기쁨이 따라온다. 물을 가득 대어 놓은 논 때문에 이 집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 같다. 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도 좁아서, 위치는 시내에 더 가까워졌지만, 얼핏 보면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난 안가(安家)처럼 여겨진다. 지금 개구리..

그런 사람과 친구 하고 싶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5 식구들을 경주에 두고, 혼자서 서울에 올라와 두리번거린 지 벌써 한 주일이 다 되어간다. 당분간 우리신학연구소에 머물면서 무남독녀 결이의 목소리는 전화로만 듣기로 했다. “아빠, 거기서 뭐해?” 종알거리던 결이가 편지를 쓰면 거기서 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엄. 편지 써서 엄마한테 보내 달라고 해!” “그런데 아빠, 내가 편지 쓰면 할 말은 그것밖에 없을 텐데. 뭐냐면, ……아빠 빨리 오라고.”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은 발음도 경쾌한 ‘경주’로 이미 달려가고 있다. 벚꽃도 이미 한껏 폼을 내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버리고, 주택가 담장 위로 라일락이 다투어 꽃을 피우고 있는데, 며칠 동안 바람이 거세게 불고 하늘이 침침했다..

경주에서, 때늦은 돈벌이에 나서며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4 벌써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내가 물어왔다. “우리 통장 만들어도 될까?” 그 질문을 듣고 그냥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럼! 남들이 이 소리 들으면 황당해 하겠다.” 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고, 인천 동암의 반지하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아내는 봉제공장에 다 녔고, 나는 의자 공장에서 밥을 벌다가 가톨릭노동사목협의회 활동가로 일하고 있던 차였다. 우리는 혼인신고서 직업란에 얼떨결에 ‘여공’과 ‘직공’으로 기재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 만큼 보잘것없는 살림에도 저금통장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가 염두에 둔 것은 교부들의 사상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토..

세상 끝 어디라도 발 닿는 대로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3 경주 남산 동쪽 기슭 통일전 근처에 봄나들이를 갔다가 아내와 ‘할머니 손국수’집을 찾아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었다. 결이는 유치원에 가고, 봄날 부부가 오붓한 한때를 보내는 것이다. 법적으로 개발이 전혀 불가능한 남산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이 마을은 해묵은 기와가 버짐처럼 이끼에 절어 고색창연하다. 국수집 주인 할머니는 음식점을 며느리한테 맡겨두고, 당신은 곁방에 차려놓은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며 담배를 팔고 있다. 얼굴이며 손 잔등은 살아오신 내력만큼 깊게 패인 주름이 가득하지만, 그 모든 주름이 당신이 밟아왔던 인생길이라서 그런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여전히 눈빛이 밝고 말씀에 생기가 돋아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번 여쭈어 보았다...

그날이 오면, 문익환 목사님을 기억하며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2 아침밥을 해먹고 우리 가족은 행장을 꾸렸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었다. 이참에 찾아간 곳은 선덕여왕릉이었다. 토함산 쪽으로 붙은 벌판 가운데 나지막이 올라와 있는 낭산(狼山)의 오롯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서 걸어 올라가면 한적하게 솟아오른 봉분이 있는데, 그게 선덕여왕의 능이다. 경주의 다른 고분들처럼 거창하게 관리되지 못한 채, 인적이 드문 산속에 방치된 듯한 느낌이다. 길을 안내하는 입석조차 없었던 것을 근처에 있는 토봉사 절집 사람들이 민원을 넣어 그나마 제대로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첨성대며 황룡사를 지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놓았다는 여왕인데도, 현대를 사는 신라인들은 이 묘역을 별로 돌보지 않았다. 토봉사라는 암자에 사..

김훈과 김민기,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1 세상을 살면서 참 막막할 때가 있다. 밥벌이가 곤란해서 그럴 수도 있겠고, 하는 일에 신명이 돋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다. 세상을 사는 남자들의 밥벌이에 대한 이야기는 를 썼던 작가 김훈이 절박하게 호소한 적이 있었다. 책 제목을 아예 이라 붙였다. 그는 말한다.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고.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 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고 했다. 밥벌이의 지겨움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면서 그들은 씨 뿌리지 않고 거두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하였지만, 김훈은 말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 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

영혼의 가족,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묻게 해주는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0 한겨울이지만 밤새 소곳하니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아침에 창을 여니 토함산이 하얗게 눈을 이고 있었다. 아랫녘은 따뜻한 기운에 비가 내렸지만, 토함산 중턱 위로는 눈발이 쌓였던 모양이다. 경주에선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선 예전에 살던 무주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이란 아예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겨울가뭄인지 비조차 많이 내리지 않았다. 추억처럼 쌓이는 눈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겨울에 정월 한 달 내내 눈이 내리던 그 산자락을 따라 걸어서 길을 오르고, 눈밭에 누워 눈송이를 입에 넣던 무주. 돌아보면 벌써부터 아득한 느낌이다. 사진=한상봉 인연은 줄줄이 이어지고 며칠 전에 표현예술치료협회 총회가 있어서 서울에 다녀..

신부나 목사에게는 신도가 하느님이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9 사진출처=pixabay.com 창을 열면 천변에 까마귀가 즐비하다. 추수가 끝난 공터에 몰려 있던 까마귀 떼가 어느새 토함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천변에 내려앉았다가, 이윽고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전신주와 전깃줄 위에 말 그대로 새카맣게 내려앉아서,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보인다. 색깔로만 보자면, 까마귀의 검정은 모든 색을 제 몸에 응축시킨 결과이다. 세상의 모든 빛에너지가 한데 모이면 하얗게 빛나는 법인데, 그 모든 빛이 사물에 새겨지면 우리 눈에 검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검정이란 빛의 육화(肉化)일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캄캄함이란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무주 산골에..

경주에 눈이 오고, 오세암이 떠오른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8 6년 동안 살던 무주를 떠나 경주로 오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묻던 말이 생각난다. “경주에도 눈이 오나요?” 작년에는 눈이 많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올 겨울 내내 기다렸건만, 호남 지방에 폭설이 연일 퍼붓는다는 소식이 들려도 경주는 마냥 겨울가뭄이었다. 바람이 매섭게 불더라도 날씨가 푸근하여 비가 내리는 일이 간간이 있곤 했다. 나중에 물으니, 경주엔 설이 지나야 눈이 내린다고 했다. 무주에선 정월 내내 눈발이 날리고, 산언덕 아래 한길까지 눈을 치우는 일은 힘들었지만, 눈이 그치고 더욱 파랗게 빛나는 하늘 아래서 눈 덮인 산자락, 그리고 흰 대숲이 흩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데 기다린 보람이 있는가, 과연 설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