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48

봄날, 처럼 따뜻하게 나를 봄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7 사진출처=pixabay.com 사람이 살 곳을 정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성싶다. 이번에 자리를 잡으면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잠깐 거쳐 가는 공간이라도 집을 보고 마음으로 화답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집이 마음에 들면 주변 환경이 영 내키지 않고, 고즈넉한 자리엔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들어가 살 수 있겠다, 하는 집들뿐이었다. 당장에 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하고, 나중 에 집을 짓더라도 일단 경주에 뿌리내리고 이 땅에 낯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모았다. 생각을 정하고 나자, 경주에 안착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을 택했다. 아파트 전세를 얻는 것이다. 수리 ..

경주에서 숨어 계신 부처를 찾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6 사람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튀게 될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누차에 걸쳐 자신에게 말해 왔다. 미래에 대하여 명확한 청사진을 갖고 살지 말자고. 나의 미래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믿고, 생의 어느 한 부분은 더 큰 어떤 흐름에 맡겨놓고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사가 제 맘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미래는 언제나 예기치 못했던 곳으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예전에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 해서 우린 그것을 ‘새롭다’ 말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길은 그렇게 새롭고 걱정스러우면서도 흥미롭다. 나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과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전혀 낯선 사람들 속에서 각별한 인연을 새로이..

사랑은 사랑을 유혹한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5 한밤중에 일어나 툇마루를 딛고 마당에 내려서니 서편 하늘에 초승달이 말갛게 떠 있다. 조만간 숲을 넘어갈 기세다. 귓불이 쟁쟁하게 차가울수록 날렵한 초승달의 한끝이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눈썹같이 가는 달이라도 그믐밤에 비하면 세상은 그 덕에 여지없이 밝아진다. 문득 저녁참에 아궁이에 지핀 장작불이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하는 《사목》이란 잡지가 있었다. 예전에 그곳 편집부에서 내게 어떤 신학 방법론을 갖고 있는지 묻는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가톨릭교회 안의 평신도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주된 관심 주제와 연구 방법론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낭만은 어디 가고 ... 농사는 현실이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4 사진출처=pixabay.com 장에 나갔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배추를 조금 더 샀다. 김장할 때 가 다 되었는데, 아무래도 우리집에서 키운 배추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한번 김치를 담그면 내년 4월까지 먹는다. 그러니 반 년 동 안 밥상을 책임져야 할 김장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올해는 김장용으로 배추를 꽤 많이 심었는데, 속이 들어찬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올 농사가 대부분 신통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밑거름도 부족하고 제때에 추비를 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게으름 탓이라는 말인데, 뭐든지 수확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게다가 농약상이 권하는 대로 장미배추 씨앗을 샀는데, 장미배추는 자랄 때 장미처럼 오목조목 예쁘..

산중에 비 내리는데, 가톨릭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3 사진출처=pixabay.com 비 오는 공일(空日) 비가 온 산을 적신다. 비가 오면 온 산이 제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산길을 걷는 이의 마음마저 투명하게 적신다. 배추밭에 산책 삼아 다녀왔다. 오줌이라도 거름으로 내야 할 판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농부의 살림살이가 늘 그러하다. 좀 전에는 아랫동네 사시는 허병섭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렇게 비오는 날 무얼 하느냐는 것이다. 내려와서 화투도 치고 차도 마시고 맘 편히 한가로움을 즐기자는 초대였다. 마침 아내는 아래윗집 처자들과 함께 진안에 귀농해서 살고 있는 분들의 집에 놀러 갔다. 어울려 면에 나갔다가 내친 김에 그 집에 눌러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온..

생활의 재구성, 자연의 혈족이 되어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2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밤새 신열을 앓고 있는 목숨들에 대한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밤새 아픈 것들이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이윽고 그 신열을 앓고 난 뒤에 병색을 여의고 환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네들이 아파하는 동안에 나 역시 밤새 옆구리가 결리고 겨드랑이가 쑤신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바로 꽃나무 한그루와 내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연대감이다. 혈육처럼 만져지는 꽃망울과 더불어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더할 나위 없이 알 길 없이 다가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이러한 공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 아, ..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1 광대정이란 무주 산골에 들어와 앉은 지 벌써 꽤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경북 상주 모동공소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고 꼭 백날을 살고, 그 해 추석을 지나고 난 뒤에 이곳에 농가주택과 논을 사서 산골살림을 시작하였다. 도시생활 삽십칠 년 만에 서울을 탈출한 뒤끝이다. 그때만 해도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결혼 생활이 아홉 해가 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어 몸이 가벼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아이 교육 문제 때문에 귀농을 주저하거나, 농촌살림에 지레 겁을 먹은 아낙 때문에 발목이 잡힌 가장을 많이 보았다. 처음 광대정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감잎이 붉게 물들고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지금 ..

참 따뜻한 그리움, 종이꽃 그늘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0 사진출처=pixabay.com 아기 감기가 여름내 낫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좀 하고 있다. 기침은 그래도 조금 나은 셈인데 가래가 남아 가슴에 손을 대어보면 글글 가래 끓는 소리가 느껴진다. 요즘 같아선 아기만 건강하면 걱정이 없겠다는 심경이다. 그래서 배 속을 파서 꿀을 담아 삭혀 먹이기도 하고, 생강 달인 물에 꿀을 타서 먹이기도 하였다. 가래엔 도라지가 좋다는 소릴 듣고 통도라지를 구해서 먹이기도 하였고, 무즙을 주기도 하였다. 그 참에 금산에 있는 소아과 병원엘 몇 차례 다녀왔다. 오며 가며 보니, 이미 여름 볕은 기울고 가을빛이 선연하다. 그 따갑던 여름, 고추를 한 광주리 따서 들고 나무 그늘에 앉아서 피워 무는 담배 맛이..

일상의 혁명, 양말을 깁고 꿰매는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9 며칠 전에 산 아랫마을에 살던 처자가 산중턱에 자리한 우리 뒷집에 방을 한 칸 얻어 이사 왔다. 아침부터 이웃의 귀농자들이 이삿짐을 날라 주려고 모였는데, 처녀 혼자 살림하는 짐치곤 꽤 많은 양이었다. 시골살림은 그렇다. 처음엔 몸만 마을로 들어와도 한 해 두 해 살다보면, 농기구는 물론이고 살림살이가 늘어난다. 한 몸을 건사하나 두 몸을 건사하나 가스레인지도 하나 있어야 하고, 밥그릇도 여벌이 필요하고, 나중엔 쌓아 놓은 장작이라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다른 게 있다면 이 물건들을 도시살림처럼 항상 새것처럼 깔끔하게 간수하기 어렵다는 점, 대부분의 집기들이 중고라는 점이다. 쓰기에 큰 불편 없고, 제 소용이 닿는다면 외관상의 흠집이나..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농민주일을 앞두고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8 사진출처=pixabay.com 얼마 전에 고구마 밭을 일구었다. 모내기를 마치고 5월 중순 이후에 고구마를 심고 나면 대개 봄에 파종할 것은 다 마치는 셈이다. 고구마 두둑을 만들면서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데, 한정 없이 돌멩이가 괭이 끝에 딸려 나왔다. 비가 내리고 나서 습기가 가시기 전에 모종을 심어야 하는데, 일은 더디고 마음만 바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돌보다 흙이 많군. 흙은 흙대로 두둑을 만들어 고구마를 심고, 돌은 돌대로 모아서 밭 가에 돌탑도 세우고 울타리 삼아 쌓아놓을 요량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가는 것이 농부의 마음이 아니던가. 살면서 만나는 이웃들이 다 좋을 수는 없다. 이런 사람도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