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1
세상을 살면서 참 막막할 때가 있다. 밥벌이가 곤란해서 그럴 수도 있겠고, 하는 일에 신명이 돋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다. 세상을 사는 남자들의 밥벌이에 대한 이야기는 <칼의 노래>를 썼던 작가 김훈이 절박하게 호소한 적이 있었다. 책 제목을 아예 <밥벌이의 지겨움>이라 붙였다. 그는 말한다.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고.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 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고 했다.
밥벌이의 지겨움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면서 그들은 씨 뿌리지 않고 거두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하였지만, 김훈은 말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 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여 주시지는 않는다.” 참으로 참담한 절창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도리없이 밥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겨운 밥벌이에 동원되는 사람들과 그는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 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휴대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는 김훈은 다른 지면에서 자신이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게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이라 하더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24글자를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오른 손엔 연필, 왼손엔 지우개를 쥔 내 몸은 부지할 곳이 없고 숨쉴 공기가 없다. 다 큰 사내가 어찌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 몸의 일을 넉넉히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한다."
연필과 지우개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던 그는 한때 집 근처 목조주택을 짓는 목수들 곁에서 한철을 보내며 말했다. 젊은 목수들의 연장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망치질이며 톱질과 대패질은 행복해 보였다고. 결국 그가 지겨워했던 것은 일 자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몸을 지니고 세상을 사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지 못하는, 그래서 그저 ‘밥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 일을 죽도록 해야 한다는 절망 같은 것이었다. 목수가 하는 일이 생계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응당 그는 그다지 부러운 눈길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생계 문제와 존재감을 동시에 얻어낼 직업을 욕심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과 자신에게 동시에 이바지하는 셈이다.
아무도 아무 데도
그러나 지 하는 일이 아무리 의미있다고 해도 사방이 적막하고 존재가 외로움을 탈 때도 있다. 내가 누구든 내가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세상 속에 깊이 속하면서도 그 안에 잠기지 못하고, 자기를 바라볼수록 제 안에 놓인 끝 모를 심연만이 엿보이곤 하는 사람이겠다. 자기를 둘러 싼 껍질을 벗겨내도 또 남는 껍질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겠다. “이쯤이면…” 하고 만족하는 법이 없는 사람, 그래서 항상 갈망하지만 자신이 뭘 갈망하는지조차 헤아릴 재간이 없는 사람이겠다. 김민기가 지어놓은 <아무도 아무 데도>라는 노랫말이 그랬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나 혼자서 서 있는데
웬 사람이 다가와 눈짓으로 내게 묻기를
오고 가는 사람 중에 누구인가 찾으려는 거요
아니오 아무도 찾아볼 이 하나 없소
인적 드문 시골길을 나 혼자서 걸었는데
웬 사람이 다가와 눈짓으로 내게 묻기를
그대 피곤한 몸 쉬일 곳 이 길 따라 그 어디메요
아니오 아무 데도 찾아갈 곳 하나 없소
해 저무는 부둣가에 나 혼자서 서 있는데
웬 사람이 다가와 눈짓으로 내게 묻기를
저 바다 건너 찾아올 누구인가 기다리는 거요
아니오 아무도 기다릴 이 하나 없소
김민기, 그 사람의 표정을 배우고 싶다.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지만 그 사람의 음색을 귀에 자꾸만 길들이다 보면 조금은 착해질 것 같다. 허랑한 욕심 줄이게 되고, 좀 더 세상에 대하여 너그러워 질 것 같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살다가 문득 적막한 길 끝에 서서 찾아볼 이도 딱히 없고, 찾아갈 곳도 딱히 없고, 기다릴 이도 딱히 없이 그저 서 있을 따름이라고, 인생이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면 더 무엇을 욕심내고 탓할 것인가
원래 김민기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화면을 수정하기 위해 칼로 화면을 긁어내다가 캔버스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가 그리던 나무가 보였다. 그 순간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을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이런 경험들이 그에게 더 낮은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한테로 직접 다가설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무렵에 김민기는 완전히 서양화 붓을 놓아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수년 전에 발매된 김민기 음반에 수록된 김지하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그 당시 김민기가 합류한 집단이 곧 김지하를 비롯한 문인,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을 벌였던 폰트라(PONTRA, Poem on trash)였다. ‘쓰레기더미 위에 시(詩)를’ 이란 뜻이다. 유신독재의 쓰레기더미 위에서 꽃을 노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들은 그 길을 갔다. 이승에서 바랄 게 아무것도, 어디에도 없다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깊숙이 아주 다른 모습인 채 이승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김훈과 김민기는 한때 내게 화두처럼 떠오른 사람들이다. 김훈의 글이 땅에 대한 명징한 태도를 요구한다면, 김민기의 노래는 땅에 대한 애잔한 눈빛을 선사한다. 그들은 똑같이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경험하게 만들지만 김훈은 제 삶에 대한 책임을, 김민기는 제 삶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연민을 호소한다. 여기서 생각한다. 나는 충분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내 생활을 온전히 감당하면서 타인에게 눈길을 돌리고 있는지.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너에게 가고 싶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 끝 어디라도 발 닿는 대로 (0) | 2021.01.16 |
---|---|
그날이 오면, 문익환 목사님을 기억하며 (0) | 2021.01.16 |
영혼의 가족,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묻게 해주는 (0) | 2020.12.21 |
신부나 목사에게는 신도가 하느님이다 (0) | 2020.12.21 |
경주에 눈이 오고, 오세암이 떠오른다 (0) | 2020.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