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신부나 목사에게는 신도가 하느님이다

모든 2 2020. 12. 21. 20:56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9

사진출처=pixabay.com

 

창을 열면 천변에 까마귀가 즐비하다. 추수가 끝난 공터에 몰려 있던 까마귀 떼가 어느새 토함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천변에 내려앉았다가, 이윽고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전신주와 전깃줄 위에 말 그대로 새카맣게 내려앉아서,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보인다. 색깔로만 보자면, 까마귀의 검정은 모든 색을 제 몸에 응축시킨 결과이다. 세상의 모든 빛에너지가 한데 모이면 하얗게 빛나는 법인데, 그 모든 빛이 사물에 새겨지면 우리 눈에 검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검정이란 빛의 육화(肉化)일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캄캄함이란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무주 산골에 살 때였다. 마을길에서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면 집까지 가는 동안 보안등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귀농하였을 때만 해도, 자동차가 없어서 늘 그 산길을 걸어다니곤 했다. 내 경우에 간혹 서울에 다니러 갔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올라치면, 그믐밤에는 사방이 칠흑 같아서 도무지 어디가 길인지 분간이되지 않았다.

산길을 앞에 두고 한참 서 있었다. 구름이 끼어 별조차 뜨지 않은 밤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기다리면, 점점 눈이 밝아져 길이 허옇게 제 살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면 평균대 위로 걷듯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사방이 어두울 때 내면의 빛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 내 앞길을 밝히는 빛이 솟아나는 것이다. 내 몸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므로.

언제나 한밤 내내 캄캄했던 어둠이 걷히면, 그 아침이면 어둠이 있던 자리에 온갖 색깔이 돋아난다. 풀잎들은 초록빛으로 다시 갈아입고, 하늘은 푸르게 다시 창공을 채운다. 노랗고 하얀 들꽃들이 다시 하루의 생애를 살기 시작한다. 어둠은 어둠 속에 이미 수많은 빛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믿기 시작한다면,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그 어둠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자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일을 하루같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가 그 고난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절망에 찬 현실이라기보다 의미 있는 현실을 창조하려는 조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만사가 뜻 없이 일어날 리 없다고 믿는 게 신앙이 아닐까. 내가 오늘 만나게 되는 사람이 아픔이더라도, 그 아픔이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들려는 하늘의 의도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도 정성스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일순 선생

 

얼마 전에 봄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에 관한 책을 만들고 싶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거였다. 강원도 원주에선 지학순 주교만큼이나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장일순 선생은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민주화운동과 생명운동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으신 분이다. 그 분이 그러한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사상은 서학(西學, 천주교)과 동학(東學)이었다.

그 전화를 받고, 글씨와 그림을 통하여 장일순 선생의 행적을 더듬어 만들어진 <좁쌀 한 알>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그분의 호가 일속자(一粟子), 좁쌀 한 알이었던 것이다. 어느 기자가 “선생님은 어째서 좁쌀 한 알이라는 그런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물었다고 한다. 너 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 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

책에서 보면, 그분이 언젠가 제재소를 경영하던 최아무개라는 이에게 “너나 나나 거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장일순 선생이 뜨악 해 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야 먹고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야 먹고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얼른 답을 못하자, “거지에겐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하였단다.

밥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 주신다 이 말이야.”

<좁쌀 한 알>이라는 책을 쓴 최성현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산속에서 살며 하루 반나절은 숲 가꾸기, 농사일 등을 하며 바깥에서 지내고, 나머지 반나절은 일본어 번역과 글쓰기를 하는 한편 작은 크기의 ‘숲속 생활 체험학교’를 열고 있다”는데, 그분이 책에서 덧붙이기를, “학교 선생님에게는 누가 하느님인가? 그렇다, 학생이다. 공무원에게는 누가 하느님인가? 지역 주민이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고, 신부나 목사에게는 신도가 하느님이다.”라고 하였다. 장일순 선생이나 최성현 선생이나 세상을 섬기는 방법에서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세상이란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으로 알고 섬기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이 하느님의 기운을 입어 창조된 동족임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장일순 선생은 묵란(墨蘭)과 글씨로 빼어난 분이었는데, 돌아가신 안동교구의 정호경 신부가 한번은 그분에게 ‘불취외상(不取外相)하고 자심반조(自心返照)하라’는 글귀를 부탁하였던 모양이다. 팔만대장경을 여덟 자로 압축한 글인데, ‘밖에서, 요컨대 껍데기에서 찾아 헤매지 말고 제 마음속을 비춰 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 문장에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를 보태서 써 주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라는 뜻이다. 내 손이 내 발을 돕고, 내 눈이 내 귀를 돕고, 내 몸의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돕듯이, 사람들도 이 세상도 서로의 은혜 가운데 기대어 살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전갈이다.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 하였다. 모든 생명이 제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뜻일 텐데, 불교에선 만인에게 부처님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고 하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믿음들은 사람을 하늘의 차원으로 현양시키는 법이다. 먼저 나 자신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고, 이 세상의 모든 목숨 가진 것들 또한 그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다. 내 눈으로 보면 내 몸속이 깜깜 어둠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살리는 모든 일이 발생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먹빛만으로 검은 새, 까마귀를 보면서 생각한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까마귀는 그의 검정만으로 새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낸다. 빛나는 깃털과 장식이 없는 새, 그 형상만으로 충분히 새임을 말하는 새. 어쩌면 칙칙하게 보일 수도 있는 까마귀 떼를 바라보면서, 한 시절을 담백하게 마감하고 다른 생애를 꿈꾸기 시작하는 자의 장엄한 색조를 느낀다.

뉴스에서는 전라도 땅에 폭설이 내려 온 길이 흰 눈에 파묻혔다는 소식을 전한다. 경주에도 오늘 아침부터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폭설로 사람의 길이 끊어져도 애초부터 길을 만들지 않았던 새들은 제 갈 곳으로 날아갈 것이다. 한 시대를 접으라고 지상을 자꾸만 하얗게 덮어가는 눈밭에서 까마귀의 검정빛은 더욱 또렷하다. 그 새의 눈빛이 특별한 날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