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8
6년 동안 살던 무주를 떠나 경주로 오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묻던 말이 생각난다. “경주에도 눈이 오나요?” 작년에는 눈이 많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올 겨울 내내 기다렸건만, 호남 지방에 폭설이 연일 퍼붓는다는 소식이 들려도 경주는 마냥 겨울가뭄이었다. 바람이 매섭게 불더라도 날씨가 푸근하여 비가 내리는 일이 간간이 있곤 했다.
나중에 물으니, 경주엔 설이 지나야 눈이 내린다고 했다. 무주에선 정월 내내 눈발이 날리고, 산언덕 아래 한길까지 눈을 치우는 일은 힘들었지만, 눈이 그치고 더욱 파랗게 빛나는 하늘 아래서 눈 덮인 산자락, 그리고 흰 대숲이 흩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데 기다린 보람이 있는가, 과연 설이 지나고 나니 경주에도 큰 눈이 내렸다. 토함산 자락이 전혀 눈에 뵈지 않는다. 폭설은 아니라도 좋았다. 물론 나보다 더 좋아한 것은 아이였다.
다들 아침부터 들뜬 기분이었고, 우리집 무남독녀 결이는 아빠랑 천변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눈발을 피부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자마자 우리 가족은 입장료가 너무 비싸서 처음 경주에 이사 왔을 때쯤 한 번 정도 가보았던 코앞의 불국사를 찾았다. 자동차로 5분 거리, 눈이 오지 않았다면 불국사의 겨울은 황량했을 터였다. 흰 눈은 불국사에게도 축복이 되리라.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경내에서 웅성거렸고, 결이는 털장화가 온통 젖어들도록 눈 속에 발을 묻고 뛰어다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이윽고 관음전에 이르자 앞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관람객은 너그럽게 불전함에 보시를 하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그윽한 눈으로 절집 마당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문득 정채봉 선생이 지으신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오세암(五世庵)〉이 생각났다. 눈먼 누이와 함께 절집에 기대어 살던 다섯 살 난 아이가 관음보살의 힘을 빌려 엄마를 만나고 성불했다는 이야기. 폭설이 내려 길이 끊어진 암자에서 관음보살만을 바라보다가 죽은 그 아이. 〈마르첼리노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겹쳐서 연상된다. 마르첼리노는 다락방에 숨겨진 먼지 앉은 예수상에 먹을 것을 갖다 드렸지.
〈오세암〉을 쓴 정채봉 선생도 일찍이 엄마를 여의었다고 들었다. 그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윤도현과 이소은이 함께 부른 〈마음을 다해 부르면〉이라는 노래 역시 그만이었다. 그 가사를 먼저 느껴 봄이 좋을 것이다.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어서 많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마음을 다해 부르면 우린 만날 수 있어.
네가 있는 곳 어디든 내 마음도 함께 있으니까.
먼 길을 걸어도 많이 힘들어도 함께 있는 듯 느낄 수 있는 건
우리만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함께 있는 듯 느낄 수 있어.
그 힘든 시간들, 이제는 웃을 수 있기를……."
그 아이는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끝내 엄마를 만났고, 누이는 동생의 공덕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복음서에는 어느 중풍병자가 부끄러움과 체면을 무릅쓰고 천정을 뜯고 예수께 다가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관음보살을 부르듯, 예수의 명호를 마음으로 내내 외었을 것이다. 그 간절함이 그를 구원하였다. 예수는 다만 그의 업장이 소멸했음을 확인해 주었을 따름이다.
권위있는 입술을 통하여 ‘죄 없음’을 통고받고서, 중풍병자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심리 학자 프로이트가 말했던 신경증에 해당한다고 말한다면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이 중풍병자는 마음의 병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해 간절히 바라고, 자신이 만든 죄업을 스스로 용서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닫힌 귀가 열릴 것이고, 주저앉아 있던 다리에 힘이 솟을 것이다. 자유로운 자가 자유를 선사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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