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영혼의 가족,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묻게 해주는

모든 2 2020. 12. 21. 21:03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0

한겨울이지만 밤새 소곳하니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아침에 창을 여니 토함산이 하얗게 눈을 이고 있었다. 아랫녘은 따뜻한 기운에 비가 내렸지만, 토함산 중턱 위로는 눈발이 쌓였던 모양이다. 경주에선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선 예전에 살던 무주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이란 아예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겨울가뭄인지 비조차 많이 내리지 않았다. 추억처럼 쌓이는 눈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겨울에 정월 한 달 내내 눈이 내리던 그 산자락을 따라 걸어서 길을 오르고, 눈밭에 누워 눈송이를 입에 넣던 무주. 돌아보면 벌써부터 아득한 느낌이다.

사진=한상봉

인연은 줄줄이 이어지고

며칠 전에 표현예술치료협회 총회가 있어서 서울에 다녀왔다. 늦은 저녁 때 집에 도착했는데,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 전에 살던 무주 광대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터를 구해 새로 집을 지은 영덕이 형네서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들었다. 형은 이번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친구를 축하하러 광주엘 갔고, 부인인 금숙 씨 혼자 집에 남아 술 한 잔 하며 책을 읽다가 우리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 집 역시 진안 산골에 지었는데, 그 골짜기에 있는 유일한 이웃인 혜윤 씨네도 외출해서 사위가 텅 비고, 혼자서 골짜기를 지키고 있던 금숙 씨는 몇몇 그리운 얼굴들 사이에서 우리 생각을 한 것이다. 아내는 내친 김에 외롭게 산골을 지키는 언니를 만나러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항시 뜬금없이 길을 나서던 버릇이 도져서 그 밤으로 우린 행장을 꾸렸다.

자동차로 세 시간이 족히 넘어 걸리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가벼운 것은 그리운 사람을 충분히 그리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 무주에 간 김에 대전에 들러 조세종 부부도 만나고 돌아왔다. 다니던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논술 학원을 열려고 준비한다고 했다. 마음으로 가까이 두고 있지만 경주로 이사 간 뒤로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벗들이다. 몇 년째 주말마다 꾸준히 대전역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끼니를 나누고 있었던 이 부부는 후배지만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경주에서 선혜 누님이 계신 경기도 양수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게 엊그제 밤이다. 두물머리에 사는 이 누님은 아내와 더 연분이 깊은 분인데, 예전에 비구니 스님이 었다가 환속한 지 꽤 오래되었다. 예전엔 전주 모악산 기슭에서 살다가 몇 년 전에 두물머리로 터전을 옮겨왔는데, 최근에 새로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단다. 그 집에서 요즘은 명상과 요가를 가르친다는데, 그 모든 것을 떠나 인간적으로 마음이 가는 누님이다. 선혜 누님 덕분에 박남준 시인도 알게 되었고, 청동으로 예술작품을 만드시는 노시은 누님도 사귀게 되었다.

지난 보름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줄줄이 많이도 만났다. 경주에 와서 거의 연락을 못하고 살던 그리운 얼굴을 몰아서 만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한 사람을 만나고나면 숱한 사람들이 씨 줄 날줄로 엮여서 줄줄이 떠오르고, 그들을 통하여 삶의 에너지를 주고 또한 받는다. 이런 인연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사람을 낳고, 그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을 낳고……, 그렇게 사람들이 관계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배운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참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살고 있으며, 그만큼 많은 은혜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가족이 그 인연의 첫줄에 서게 될 텐데, 그들이 함께 보낸 절대적 시간과 공간, 노고와 사랑이 핏줄만큼이나 완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위암으로 돌아가신 둘째형의 두 번째 기일(忌日)이었다. 경주에서 포항 가는 길목에 있는 경주 묘원으로 형을 찾아갔다. 천주교 묘역 맨 뒷줄에 장인어른과 함께 누워있는 형의 묘소 주변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술 한 잔 올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묘에 꽂아 드렸다.

향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결이가 말했다. “아빠, 진짜 큰아빠가 담배 피우는 것 같아.”

그 형이 치료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병원 문을 나서기 전에, 병원 현관에 앉아 눈 내리는 거리를 지상의 마지막 풍경인 양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떠오른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재듯이,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시선을 던지고 있는 장엄한 모습이다. 평소 가늠할 수 없었던 가족의 거리는 큰일이 닥치면 분명해지고, 궂은 일을 자청하는 부모자식 형제가 있어 그나마 삶이 견딜 만하다. 그런 느낌이 밀려 오면 그들 가족이 내 가장 가까이 머무는 천사들임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한상봉

손끝에 닿지 않아도 좋을, 영혼의 가족

우리 가족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모여 살았다. 서울과 인천을 떠나지 않던 가족들 가운데 큰누나네는 직장 때문에 충남 태안에 내려가 살고 있는 아들내미를 따라서 거처를 옮겼다. 둘째형은 학교 공부를 마치고 김해공항에 취직되는 바람에 20년 넘게 고향을 떠나 경남 김해에서 살았었다. 거기서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워낙 먼 거리에 살다 보니 명절 때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집 막내아들이었던 나는 내내 서울 언저리에서 배회하다가 전북 무주며 경북 경주 등을 떠돌고 있다. 벌써 얼추 7년째 객지 생활인데, 나중에라도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객지에 살다 보니, 가족들이 수시로 때때로 안부도 물어 주고, 가끔은 휴가를 빌미삼아 집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걸 생각하면, 거리가 인연의 깊이를 더 예민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인연의 깊이란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서로 걱정해 주고 마음을 써 주면서 더 우묵해지고 섬세한 결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게 어디 가족뿐이랴. 마음으로 통하고, 손끝이 닿지 않아도 피 한 톨 섞이지 않아도 따사로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항상 반듯하고, 제 몫의 사명을 다하고, 품이 넓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방으로 흠 많은 사람이라도 왠지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득한 전생에서 맺은 인연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다가서면 물러나고, 물러나면 다가서면서 인연의 거리를 유지 하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을 또 다른 의미에서 ‘확대가족’이라 부르면 어떨까

예전에 이런 사람을 두고 ‘영혼의 가족’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그냥 살면서 맺게 된 가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유난히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주변에 가엾은 이들을 가족으로 초대한다. 머리로 따지지 않더라도 그 사람 기질이 그러한 가족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의 부모를 대신하여 양육하는 그룹홈(grouphome)을 하는 이들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남의 아이들을 제 가족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모여 살지 않아도 마음으로 공간적 거리를 삭제하고 사는 가족도 많을 것이다. 내게는 노동사목을 하던 예전의 동지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이고, 서울에 무주에 전주에 홍천에 대전에 양평에 사는 벗들이 그러할 것이다. 살면서 인연을 헤아리다 보면 혈육도 가족이고, 영혼의 가족도 가족이고, 가족의 가족도 가족일것 이다.

사람은 우주 삼라만상과 동식물에게서도 생명의 기운을 받을 테지만, 사람은 역시 사람에게서 받는 기운 속에서 가장 행복해지는 것 같다. 인연의 깊이와 넓이 안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어떤 ‘은혜의 바다’ 가운데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밥 한 그릇에도 숱한 사람들의 공덕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온갖 영양분을 취하여 자라는 나락은 농부의 손을 거쳐, 그 곡식이 우리 밥상에 오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고하는가. 그 밥상에 오른 하얀 쌀밥을 계산서에 찍힌 쌀값만으로 셈하려 드는 것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족의 범위는 무한정 커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안목이 트이게 되는 법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묻게 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무슨 말을 건넬까 내 손길에서 그네들이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